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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한 몸으로 잠시 살다가는 것, 부지런히 수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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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2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1-24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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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심일화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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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2 08:38 조회 1,1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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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한 몸으로 잠시 살다가는 것, 부지런히 수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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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바구니의 탄생지 

이제 바이샬리로 이동한다. 새 벽 6시 출발이니까 보통 기상시 간은 4시다. 그래도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없고 난생 처음 방문하 는 곳이라 기대감과 설레임이 앞선다. 합창단 단원중에는 60세 가 넘은 분이 꽤 된다. 서울, 경 기 연합합창단 50여명이 참석한 이번 성지순례 음성공양은 모두

에게 정말 뜻깊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바이샬리 하면 첫 비구니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북인도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고, 부처님 생애에 얽힌 일화들이 많은 곳이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아버지 정반왕의 위독 소식을 듣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 친의 임종을 지켰고 아버지의 다비식을 바라보며

“이 불을 보라. 욕심의 불길은 이 불보다 뜨겁다. 무상한 몸으 로 잠시 살다가는 것이니 부지 런히 수행하라”

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캬 족 남자 500명이 부처님을 좇 아 출가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넣었던 스 투파 앞 에 아쇼카 석주가 서 있고 꼭대 기에는 사자상이 앉아 있다.

정오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 며 음성공양을 올리고, 스투파를 돌며 참배를 했다. 오후엔 갠지 스강을 다리를 건너 바트나로 향했다. 다리 길이가 91띠. 세계 두 번째 긴 다리란다. 오래 된 다리어서인지 중간 중간 보수중 이라 왕복이 안될땐 일방통행으 로 가기를 몇 번, 어두워져서 목 적지에 도착했다. 저녁 공양 후 ‘모두 일찍 자리에 들었다.

- 라즈기르, 죽림정사

9일날 아침 4시에 기상을 하고 6시에 나란다대학 유적지로 출발했다. 서기 500년경에 세워진 세계 최초 불교대학이며 신라의 혜초스님과 중국의 현장법사도 여기서 유학을 했다. 당시 학생 만 1만 명, 교수는 1000명이었다 고 한다.' 지금은 빛바랜 붉은 벽 돌의 터만 남아있는데 그 터를 둘러보기만 해도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20분정도를 달려 죽림정사로 갔다. 죽림정사는 불 교사원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곳곳에 대나무가 보였 다.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 은 그 이듬해 이곳을 찾았다. 2500년 전, 스승으로서는 젊으신 36세의 부처님을 만나 120세의 우루웰라 가섭은 비로소 편안함 을 얻었다고 한다.

죽림정사에서 1시간정도 버스 를 타고 다시 영축산으로 갔다. 인도에서는 거의 평지로만 다녔 는데 높은 산을 보자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경전을 보다보 면 영축산 에서의 부처 님 행적에 관한 얘기를 많이 접 했기에 서둘러 오르고.싶었다. 30분정도 조금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갔다. 산 정상에는 부처님과 아난다존자가 머물던 정사 터가 있었다. 멀리 산등성이가 구불구 불 펼쳐져 있고 어디선가 불어 보는 시원한 바람은 상쾌하기만 하다.

대만, 중국에서 온 불자들이 좁은 장소에서 참배를 하고 나 오자 우리도 서둘러 육법공양을 올리고 음성공양으로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바로 눈 앞, 오래 전 부처님께서 거처하시던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왜 그 리 눈물이 솟아 오르던지, 온갖 허물 속속들이 보고 계신것 같 아 자책감이 커져서이겠지... 영 죽산 정상에는 그렇게 눈물바람 을 남기고 돌아왔다.

-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의 보리수

10일 오전 8시 부처님께선 6년 고행을 끝내고 깨달음을 얻으신 자리 마하보디 사원으로 향했다. 전날 사원 근처까지 와서 숙소 를 정해서 방문하기가 수월 하였다. 사원에 들어가는 입구부 터는 모든 순례객들은 신발을 벗었다. ‘

높다란 대탑이 먼저 눈에 들어 왔는데 2250년 전,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마하보디사 원은 세계 각국의 순례객으로 북적거렸고 빈 공간이 거의 없 었다. 마이크에서 들려오는 각기 언어가 다른 진언소리, 오체투지 하듯이 절을 하는 자, 서양인들 도 곳곳에서 좌선을 하고 시간 이 멈춘 듯 그렇게 앉아있다. 우리는 탑을 바라보고 있는 잔디 밭에 자리를 잡고 육법공양과 음성공양을 올렸다. 처절한 고행 을 내려놓으시고 해탈의 경지에

오른 자리여서일까. 지저귀는 새 소리처럼 우리들의 음성도 구르 듯 날아올랐다.

깨달음의 자리 보리수나무를 돌며 석가모니불을 염송했다. 그 리고 각기 자유롭게 자신이 원 하는 자리에 앉아 참선하는 시 간도 가졌는데 보리수나무를 정 면으로 바라보고 조용히 좌정을 했다. 눈을 감고 여러 나라의 각 기 다른 진언소리와 머리위에서

위를 돌고 있었다. 기원정사처럼 넓고 잘 정돈된 정원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마지막 음성공양 을 올렸다

어둠이 시작되면서 나룻배를 타고 갠지스강에 촛불기원 행사 를 했다. 조그만 나뭇잎을 엮어 그 속에서 꽃 몇송이 넣고 촛불 을 밝혀 물에 흘러보낸다.

물 위에 떠 가는 촛불을 바라 보며 우리의 염원도 실어 보내 고……잠시 후 강 건너편에 닿았 다. 배에서 내려 갠지스강의 모 래를 조금 집어 들었다. 경전을 보다보면 갠지스강의 모래알(항

지저귀는'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상태가 신기했다.

30분동안 그렇게 우리식대로의 불공을 끝내고 다시 찾은 곳은 수자타 스투파 가 있는 곳이 었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끝 내고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가 까운 강에서 목욕을 하시고 언 덕을 오르실 때 거의 탈진 상태 였다고 한다.

이 때 수자타 여인이 우유죽을 부처님께 공양을 했으므로 건강 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수자 타여인은 자신의 집을 부처님께 참선장소로 제공하였고 바로 이 터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고행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 간 자리다. 멀리 보이는 언덕의 나무 한 그루도 그냥 스쳐보기 엔 아쉽기만 하다.

바라나시의 녹야원(사르나트), 그리고'갠지스강 11일 아침 6시 바라나시에 있는 녹야원과 갠지 스강으로 향했다. 바라나시는 인 도에서 힌두도시라고 할 만큼 힌두교가 가장 많다. 그리고 가 까운 곳에 갠지스강이 위치해 있어 불의도시라고 부르기도 한 다. 오전에 바라나시에 있는 영 불탑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녹야 원으로 갔다. 부처님께서 첫 설 법을 펼친 초전법륜지이다. 그 자리에 43111 높이의 스투파가 세 워져 있었고 순례객들이 탑 주위를 돌고 있었다. 기원정사처럼 넓고 잘 정돈된 정원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마지막 음성공양 을 올렸다

어둠이 시작되면서 나룻배를 타고 갠지스강에 촛불기원 행사 를 했다. 조그만 나뭇잎을 엮어 그 속에서 꽃 몇송이 넣고 촛불 을 밝혀 물에 흘러보낸다.

물 위에 떠 가는 촛불을 바라 보며 우리의 염원도 실어 보내 고……잠시 후 강 건너편에 닿았 다. 배에서 내려 갠지스강의 모 래를 조금 집어 들었다. 경전을 보다보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이라는 말이 잘 언급되는데 부처님은 무한한 공덕의 수를 모래 알로 비유하신 것이리라.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배안에서 언덕의 화장터를 올려다 보았다. 다섯 혹은 여섯 기라고 표현해 야 되나…실제 시신이 화장되는 장면이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마 음으로 부지런히 광명진언을 외 웠다. 나의 몸이라고 생각했던 육신, 어느순간 저렇게 깨끗이 흔적을 지워야 하는거구나. 캄캄 한 밤, 하늘엔 별이 총총한데 명 멸하는 영혼의 안식처는 어느 곳일까?

배에서 내릴때 잠시 힌두교 의 식행사를 참관했다. 그들이 믿는 시바신에게 바치는 의식행사인 데 좀 특이했다. 음악소리, 북소 리, 나팔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남자 7명이 서서 향을 피우면서 여러 동작을 되풀이 연출했다. 관람객이 많았는데 마치 종교가 관광상품이 된 듯 하다

이 날 저녁을 끝으로 부처님의 8대성지 순례는 끝났다. 12일 오 전 자유시간을 갖고 3시에 공항 으로 나갔다. 다시 밤11시에 방 콕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 아온 시간은 13일 오전 6시45분 이었다.

우리 총지종 합창단원 4명과 함께 동반했던 연합합창단원들 전원이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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