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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염하던 찰나, 그리고 기다리던 아들의 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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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4-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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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4-07 12:46 조회 1,6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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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대성사 일대기 (18회)

관세음보살 염하던 찰나, 그리고 기다리던 아들의 기별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선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서울이 수복되고 38선 너머로 국군과 유엔군이 진격하자 대성사는 더욱 간절히 아들의 소식이 있기를 기대했다. 서울 하숙집에 기별해도 소식을 알 수 없었고, 밀양 출신의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주변에서는 제삿날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했지만, 대성사는 한결같이 ‘관세음보살’만을 외울 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관세음보살을 염하던 어느 날 대성사는 잠깐 삼매에 들게 된다. 자식을 걱정하던 마음과 두려움이 오롯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가 또렷이 본래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시간이 정지되고 세상 모든 것과 일치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놀라운 찰나를 맞을 때 누군가 급히 대문을 두드렸다. 이어서 금강관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의 기별이 온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서울이 급격히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자 손순표는 피난 시기를 놓쳤다. 하숙집을 나와 학교로 가던 길에 인민군의 검문에 걸리게 되고 이내 의용군으로 징집됐다. 군사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급된 군복과 총을 받아 인민군의 남행길에 동참했다. 개인의 의지와 이념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밀양 집으로 연락할 아무런 방도가 없이 다른 인민군 병사들과 함께 남으로 남으로 행군하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거칠 것 없이 남으로 향하던 인민군 행렬이 가로막힌 것은 영천 부근에서였다. 손순표는 고향 집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과 두려움이 커졌다. 


 승승장구하던 인민군 행렬에 유엔군의 폭격이 잦아졌다. 행군 도중 비행기를 피해 숨어야 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인공기 아래 통일을 이룰 것 같던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 발이 묶였다. 소위 부산 교두보 전투 또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로 불리는 저항선이 펼쳐졌다.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8일까지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삼은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 중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옥이 펼쳐졌다. 포탄이 빗발치고 죽어가는 병사와 상처를 입은 이들이 뒤섞여 대지 위로 붉은 피가 강을 이루어 흘렀다. 당시 낙동강은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피로 물들었다. 산과 들은 포탄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미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소강상태의 전선은 조금씩 북으로 밀려갔다. 미군은 정밀 폭격과 화력을 앞세운 막강한 전력으로 인민군을 밀어붙였다. 곳곳에서 전선이 흐트러졌고, 국군은 그 틈새를 뚫고 나갔다. 손순표의 앞에는 미군의 폭격이 덮쳤고 뒤에는 후퇴하면 총살이라는 독전대의 독설이 이어졌다. 참호 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을 때 전선은 포탄과 총탄이 빗발쳤다. 인민군 대부분은 고립된 채 전선은 고착되고 있었다. 죽음과 삶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잠시 포격이 멎자 손순표는 밀려오는 미군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게 된다. 참호 속에 갇힌 그에게 흑인 병사는 총구를 겨누었고, 손순표는 순순히 손을 들어 투항한다. 낙동강 전선 영천 인근에서 손순표는 미 1기병사단의 포로가 됐다. 이때가 1950년 9월의 일이다. 포로가 된 손순표는 일단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옮겨져 전쟁포로의 신분이 된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로수용소에서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 같은 포로 신분이었지만 남쪽 출신 북쪽 출신으로 편이 나뉘고, 이념과 신분에 따라 패가 갈렸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부의 테러와 살육은 전쟁터보다 나을 바 없는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 특히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전쟁포로 문제는 가장 심각한 주제로 떠올랐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포로들의 의사를 확인해 남과 북으로 송환할 것을 합의하자 수용소 내부는 더 큰 참변이 발생했다. 소위 반공포로를 막기 위해 친공 캠프에서는 날마다 사상검증과 인민재판을 벌였고, 남쪽 출신이던 손순표도 인민재판의 대상이 됐다. 남쪽 출신에다 대학생 신분으로 부르주아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꼼짝 없이 처형을 앞두게 됐다.


 한밤중 막사의 창과 문을 모두 가린 채 인민재판이 열렸다. 사상이 의심되고 소위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이들은 한명씩 재판정에 섰다. 이윽고 손순표의 차례가 되자 서슬 퍼렇게 사상검증을 하던 인민군 군관은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선언했다.

 

“이 동무는 누가 봐도 반동이오. 인민의 고혈로 호의호식한 파렴치한 적이오. 이런 적은 기회만 생기면 다시 인민을 수탈할 것이오. 더 볼 것 없이 처단해야 하지만 혹시라도 이 동무에 대해 아는 사람 있으면 말하시오.”


 침묵이 인민재판장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아무도 나서서 변론하지 않는다면 끌려가 처형될 위기가 닥쳤다. 이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나선 이가 있었다. 그는 밀양 출신으로 진즉 월북하여 인민군 군관이 된 이였다. 밀양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때 대성사와 인연이 있었다.


 “그자는 부르주아 출신이 아닙니다. 조부는 독립운동을 했고, 부친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농민과 무산계층에게 혹독한 일을 했던 일도 없고 오히려 가난한 학생의 편을 들고 언제나 나서서 도왔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인민의 적으로 행동한 적이 없는 자입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손순표의 운명이 갈렸다. 인과는 알지 못할 때 천사거나 악마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그가 나서서 변론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일들은 달라졌을 것이다.


 1952년 봄이 되면서 전쟁은 지루한 공방전으로 피아 모두 고착된 전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거나 나아가지 못했다. 1952년 봄과 여름을 지나면서 휴전회담이 지루하게 진행됐지만, 북으로 돌아갈 것인지 남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심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해 4월 손순표는 포로 분리수용 절차에 따라 남쪽 포로로 분류되었다. 남쪽을 선택한 포로들은 거제도를 떠나 부산, 마산, 영천, 광주, 논산 등 5개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잔류를 막으려는 인민군 포로들의 정치공작과 압박이 이어졌지만, 운명의 줄기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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