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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불교대회, 진정한 문화교류의 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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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8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7-09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기고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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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총지종 중앙교육원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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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3 05:02 조회 1,5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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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불교대회, 진정한 문화교류의 보 되길”

진언종 교육의 중심 지적원

넷째 날도 역시 교토에 있는 사찰 을 방문했다. 오전에 방문한 곳은 진 언종 지산파 의 총본산인 지 샤꾸잉[지적원 ]인데 이 절 또 한 교토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지 산파는 전국에 3000여개의 말사를 거 느린 진언종의 한 갈래로서 이곳 지 적원은 승려교육과 함께 학문을 중시 하는 절이다.

홍법대사 공해 가 중국에서 밀교를 받아들여 일본에 전한 후 300 년이 지났을 때 공해가 개산한 고야 산의 종풍이 쇠미할 무렵 카쿠반  이 고야산에 올라 그러한 사정을 보고.개탄하고는 전법 대회를 부흥하여 교학진흥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후 카쿠반은 학도들을 양성하고 교학을 진흥하여 ‘신의 ’ 라는 진언교학을 확립하게 된다. 그래서 지산파에서는 공해를 개조로, 카쿠반을 흥교대사 로 받들 어 모신다. 그래서 두 스님의 조상 이 금당  좌우에 모셔져 있 다. 가운데에는 밀교의 주불인 대일 여래가,모셔져 있다.

지적원은 명치유신 때까지 우여 곡 절을 겪으면서 교학이 강한 밀교사찰 로서 발전하다가 명치유신을 계기로 온갖 박해를 받던 중 1882년 금당이 전소되고 근래에 다시 지어졌다. 절 의 곳곳에 나름대로의 엄격한 가풍이 보이고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의 대부분의 사찰은 본존이 어 둡게 숨겨져 있는데 반하여 지적원은 밀교 사찰답게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불단이 꾸며져 있었다. 특 히 스님들의 법복이 보라, 초록 등 매 우 화려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지적원은 에도시대에는 진언종 이 외의 다른 종파도 받아들여 500명 이 상의 승려들이 항상 공부하고.있었다 고 한다. 특히 이곳의 정원은 중국의 여산 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일 본에서도 이름난 아름다운 정원이라 고 한다.

일본 정원은 깔끔하기는 하지만 너무 인공적인 냄새가 나서 우리 한국 '인들의 정서 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

어쩐지 백제 냄새가 나는 약사사

오후에는.나라에 있는 약사사 에 들렀다. 이 절은 청동대불로 유 명한 동대사와 6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680년 텐무천황이 병이 낫기를 기 원하면서 만들어진 절인데 이후 1300 년을 지나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 다. 특히 1528년에는 현재 국보로 지 정되어 있는 동탑만을 제외하고 전 

가람이 전소되었다. 1967년에 대대적 인 중창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일본도 자중지란에 의한 전란으로 목조건물이 많이 소실되고 실화로 인 한 화재도 빈번하게 일어나 예전 모 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들이 드물 다. 유일하게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탑은 매우 아름다운 목탑이 다. 마주보고 서 있는 서탑은 1981년 에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동탑과 달리 화려함을 한껏 뽐내고 있다.

탑은 모두 3층탑이지만 모코시라는 차양칸이 달 려 있어 실제보다 층 이 많아 보인다. 이 차양칸 때문에 사람 들은 용궁과 같은 모 습으로 지어졌다고 해서 류구즈쿠리라 불렀다고 한다.

본당인 금당에는 동방유리광정토의 교 주이신 약사 삼존불 이 모셔져 있는데 앞 에서 바라보아 왼쪽 에는 월광보살, 오른 쪽에는 일광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 었다.

이 삼존불도 모두 일본의 국보라고 한 다. 나라지역의 건축 물이나 불상은 아무 래도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친근감이 간다.

국보로 지정된 성 관음보살상도 내가 보기에는 완연한 백제풍인데도 이들 은 그러한 표현을 굳이 외면하고는 굽타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한다. 그 뿐 아니라 고구 려, 백제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 도 어떤 부분에서는 굳이 중국에 끈 을 대어 바로 직수입된 것 같은 이미 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무래도 우 리나라에 대하여 뿌리 깊은 열등감이 있나 보다.

일본인들이 유독 우리나라에 대해 서만은 칭찬을 아끼고, 특히 고대사 부분에서는 왜곡과 함께 한반도의 영 향을 애써 감추려고 하고 있는 것으 로 보아 이들의 한국에 대한 뿌리 깊 은 콤플렉스는 쉽게 제거될 것 같지 는 않다. 그래서 일본과 우리를 가깝 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지도 모르겠 다. 약사사에서 하나 특이한 것은 부 처님의 십대제자의 모습을 현대적 기 법으로 조각해 놓았는데 아주 실감이 나도록 잘 조성되어 있다.

일본 최초의 절 사천왕사

일정의 마지막 날인 29일에는 오사 카의 사천왕사 를 방문했 다. 사천왕사도 그동안 여러 번 방문 기회가 있었으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 로 늘 일정에서 빼버리는 바람에 오 사카를 여러 번 왔어도 방문하지 못 했던 곳인데 오늘 드디어 구경하게 되었다.

사천왕사는 일본 불교의 막을 연 성덕태자 가 최초로 지은 절인데 593년에 건립되었다. 아스카  

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던 때 인데 시대에는 일본이 중국이 나 우리 나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던 때인데 한반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 려는 소가 씨족과 이를 반대하던 모 노노베 씨족 간에 치열한 싸움이 있 었다.

성덕태자는 소가 씨족을 지원했는 데 싸움에서 이기면 반드시 그 은덕 으로 절을 짓겠다고 사천왕에게 기원 했다. 그 결과 소가씨족이 이기고 성 덕태자는 약속대로 사천왕사를 지었 던 것이다. 절을 지을 때도 성덕태자 

는 백제의 기술자들을 모셔다 지었다. 일본에는 당시에 이런 절을 지을 건축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 이다. 그 때에 모셔져간 기술자 중 한 사람이 공고 시게미츠라는 사람인데 절이 완성 된 후 성덕태자는 절의 유지와 보수 를 이 분에게 맡겼으며 이후 1400년 동안 이 가문에서 사천왕사를 관리하 고 보수해 왔다는 것이다.

이 절은 시텐노지라고'하여 그 양 식이 백제의 가람 양식을 잘 보존하 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옛 사원 의 모습을 짐작하려면 사천왕사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성덕태자를 가르친 스승이 바로 고구려의 혜자  스님과 백제의 혜총 스님 이다.

성덕태자가 일본 불교의 서막을 열 고 지금까지도 일본 불자들의 지침이 되는 17조 헌법을 제정하여 삼보귀의 와 불교 정신을 강조한 것은 우리나 라 고대의 훌륭한 스님들의 가르침이 없었으면 생각해보지 도 못한 일이

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 외에도 나라와 오사카 지역의 불교 유적에서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뿌둣했지만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될지. 일 본인들은 또 얼마나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을지. 시간이 넉넉하면 좀 더 세심히 살펴보고 한국과 일본 불교의 상이성과 동질성을 심도 있게 비교해 보고 싶었지만 4박 5일간의 아쉬운 일정을 이렇게 보냈다. .

 

후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일불교문화 교류대회라는 이 행사가 상당히 활기 를 띠었는데 한중일불교교류대회가 생기고부터는 갈수록 열기가 식어지 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돌이켜보면 이 대회가 과거에는 상당히 비중 있 는 불교인들의 대회였을 것이다. 아 직 중국불교가 등장하기 전이라 한국 불교계가 외국의 불교계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이러한 대회를 통해서 일 본과 교류하는 길 밖에는 없었을 것 이다.

초창기에는 일반인들이 외국에 나 가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 한 대회를 명분으로 바깥바람도 쐴 수 있었을 테고 불교인들의 안목도 넓힐 수 있었을 테니 이 대회의 권위 가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여 행도 자유로워지고 중국의 대외개방 으로 한중일 3국이 교류하는 한중일 불교교류대회가 생기고부터 무게 중 심이 그리로 옮겨 간데다 한일불교문 화교류는 좀 시들해질 수도 있겠구나 싶다.

교류를 시작한 지 30년이면 벌써 한 세대가 지날 시기인데 너무 정형 화된 형식을 벗어나 좀 더 새로운 방 식을 모색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처럼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끼 리, 일본 사람은 일본사람끼리 따로 앉아 대화도 없이 만찬장에 앉아 있 는 모습은 정말.생각해 봐야 할 문제 이다.

통역을 군데군데 배치하더라도 양국 불교도들이 의미 있는 대화도 좀..나누 고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에 진정한 우의도 싹트게,될 것이다. 사찰 방문을 히더라도 좀 더 심도 있는 방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대회 참가자들이 문화적 소양을 제대로 갖 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양국 간 문화교류는 요원한 일이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양국 불 교도들이 일반인들에게 내세울 만한 이벤트도 마련하여 불교의 위상을 높 ’ 이고 진정으로 양국의 불교문화 발전 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획을 통하여 양국 불교도들이 불자로서의 자부심 과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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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사의 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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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단앞에서 기원드리는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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