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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지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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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0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9-06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설화/신행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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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심일화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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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3 07:12 조회 1,8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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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설화 (47회)

보은의 지옥도

장을 보러 저잣거리로 나온 스님은 이곳저곳 을 기웃거렸다.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을 구하고, 법당 바람벽에 색칠할 그림 물감을 사기 위해 서였다. 극락도를 완성하느라 주지스님이 사다 준 재료들을 남김 없이 다 사용해버렸기 때문 이었다.

이제는 지옥도를 그릴 차례였다. 스님은 먼 저 물감을 파는 가게를 찾아가 붉은 물감을 다 섯 통, 그밖의 색깔들을 한 통씩 샀다. 가게 주 인이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스님, 잘못 사시는 거 아닙니까? 어디에다 쓰시려고 붉은 물감을 많이 사십니까?”

“이번에는 지옥도를 그릴 차례지요. 지옥산 을 그리려면 이것도 부족할지 모르겠소.”

“지옥산이라됴?”

“이글이글한 불길이 산처럼 솟는다고 해서 지옥산이라고 부르지요.”

“지옥산에서는 하루도 못 살겠군요.”

“그렇지는 않지요. 지옥산 한가운데는 흙탕 물 개울이- 있지요. 지옥산 사람들은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거기에서만 살아야 한답니다. 마음 을 깨끗이 씻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게 되지 요.” ,

스님은 물감 값을 치르고 난 뒤, 거스름돈은 아예 가게 밖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에게 주어버렸다. 아이는 발가락이 보일 만큼 해진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시커먼 먼지가 얼굴에 검댕처럼 묻어 있지만 눈망울은 또렷또렷하였 다.

“스님, 보따리를 이리 주세요 들어다 드릴게요”

“괜찮다.”

“그럼, 이 돈 다시 가져 가세요. 전 공짜를 싫어하거든요.”

“허허, 이놈 봐라.”

스님은 금세 아이가 마음에 쏙 들었다. 아이 가 요구하는 대로 보따리를 들려주었다. 아이 는 보따리를 들지 않고 여자처럼 머리 위에 올' 렸다.

“쯧쯧, 엄마가 계시느냐?”

“아니오.”

, 아이가 먈갈을 돌렸다 ’ 

“스님, 저도 극락도를구려할 수 있어요?”

“아니,,네 어떻게 내가'그린 극락도를 아 느니?”

“소문을 들었거든요. 장터 사람들 모두 알고 있어요.”

“극락도는 허락받고 보는 그림이 아니란다. 아무라도 가서 볼 수 있는 그림이지.”

아이는 기와집을 지날 때 침을 이 사이로 새 오줌처럼 찍 쏘았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이 집 어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 줄 아세 요? 할머니를 효도 관광시켜드린다고 함께 나 갔다가는 버리고 왔대요.”

“허허, 지옥 갈 사람이구나.”

“그렇지요? 그런데 스님은 또 무슨 그림을 그리려고 이 통들을 사가세요?”

“이번에는 지옥도를 그리려고 한다.” ‘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데요?

“글쎄다.”

“극락도는 어렵지 않게 그렸었는데 말이다.” 사실이었다. 극락도는 어렵지 않게 완성하였 던 것이다. 스님 자신이 보았던 경치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들만 고르다 보니 선경이 되었다.

산은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리산 봉우리를 대여섯 개 빌려 왔고, 흐르는 개울물을 사람들이 한 번도 손을 씻어보지 못한, 흰 구름이나 발을 담가본 남해의 청 산도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암자 는 신라시대에 달달과 박박이 살 았다는 띠집을 상상으로 지었다. 극락도에 들어갈 사람을 찾는데 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스님의 눈을 밝혀주고, 귀를 씻어주고, 마음 밝혀준 사람들을 그려넣으 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반찬거리를 개울물에 씻던 중, 떠내려 가는 배추 한 잎을 주우려고 몇 십 걸음 쫓아 가다 넘어져 다친 스님을 뺄 수 없었다.

‘배추 한 잎을 아낄 줄 아는 스님이라면 극 락 가기에 충분하지.’

그리고 스님들보다도 부처님께 더 열심히 절 을 하는 할머니도 그려 넣었다.

‘할머니의 정성은 부처님도 이미 감동하셨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사자처럼 당당한 스님을 그렸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걸림없는 스님을 그렸으며, 흙탕물에도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 럼 맑은 스님을 그렸다. 흰구름과 새떼를 그린 것은 맨 나중이었는데, 그것은 빈 하늘이 허전 하고 억울해하는 것 같아서였다.

“극라도가 더고 싶다고 했지?” 

“네. 스님께서 보여주신다면 저도 보여 줄게있어요.”

“스님, 이리 와보세요.”

스님은 아이를 따라 장터의 막다른 골목으로 갔다.

“스님, 저기를 보세요.”

“허공에 무엇이 있다는 말이니?”

“허공이 아니라 저 전깃줄을 보시란 말예 요.”

가는 전깃줄에는 들풀이 얹혀 살고 있었다. 가는 전깃줄에 뿌리를 내리고서 밤이슬로 목을 축이는 들풀이 틀림없었다. 스님은 처음에 검 불이 전깃줄에 달라붙은 줄 알았지만 그게 아 니었다. 들풀은 거친 바람을 이겨내려고 서로 어깨동무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노란 꽃도 피었어요.”

“관세음보살.”

저 들풀이 바람에 꺾이지 않고 사는 법을 보 고 있었구나.”

스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들풀 보살’님이야말로 내가 그린 극락도 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스님은 붓을 몇 자루 더 산 뒤, 아이를 데리 고 절로 향했다.

“엄마가 안 계신다고 했지.”

“네.”

“쓸쓸하겠구나.”

“스님은 엄마가 계세요?”

“아니다.”

“그럼, 스님도 쓸쓸하시겠어요.”

“그렇지 않아, 난 그림을 그리니까.”

“나도 그림을 배우겠어요. 그림을 그리면 쓸 쓸하지 않다니까요.”

스님은 아이와 이야기하면서 봄바람에 실려 오는 보리내음을 맡았다. 산허리를 돌아나가는 데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이윽고 스님의 보따리보다 조금 큰 옹달샘이 나타났다. 스님은 물 한모금으로 목을 축였고, 아이는 샘 밖으로 졸졸 흐르는 샘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제야 아이의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아이는 스님의 맑은 눈과 오똑한 코를 닮아 있 었다.

“원한다면 오늘부터 나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해라.”.

“스님, 고맙습니다.”

“자, 짐부터 다시 받아라. 붓과 물감을 소 중히 다루는 방법부터 배워야 하느니라.”

, “그때부터 아이는 절까지 다시 보따리를 머 리에 이고 따라갔다.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 는 것 같은 일주문을 지날 때까지 아이는 보따 리를 머리에서 내리지 않았다.

아이는 다음날 스님에게 머리를 깎이고 난 후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미 그려진 극락도를 보고 절 마당에다 싸리빗자루로 몇 십번씩 그리는것이 그림 공부였다.

“싸리빗자루를 붓으로 여기거라. 청소도 하 고 그림 공부도 하니 얼마나 좋으냐.”

“네 스님.”

“또 한 가지 지킬 것이 있다. 내가 허락할 때 까지는 지옥도를 보러 와서는 안된다.”

“네.”

스님은 아이에게 지옥도를 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극락도의 개울처럼 거울 같은 아이 마음에 무서운 지옥이 스며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스님의 주의를 지키기 어려웠다. 지옥도는 극락 도와 겨우 열 발짝 거리를 두고 그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싸리빗 자루로 그림 연습을 하다가 실수 로 슬쩍 고개만 젖히면 볼 수 있 는 거리였다.

더구나 요즘은 스님을 비난하는 소리가 공양간에서도 들리고, 심

지어는 정랑(화장실)에서도 소곤소곤 났다. 아 이가 가까이 가면 가랑비소리처럼 잦아들었다. ‘스님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법회가 열리던 보름날에는 절에서 스님을 쫓 아내자는 소리까지 돌았다. 스님들을 욕되게 하였으니 절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부분 스님들의 그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 다. 이제 아이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북처럼 둥그런 달이 둥실 떠오른 밤이었다. 아이의 가 슴은 둥둥둥 북소리를 내었다. 아이는 완성된 지옥도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보리 수 가지에 앉아 있던 부엉새가 부엉부엉 거친 날개짓을 하며 지옥도 가까이 왔다가는 사라졌 다.

아이는 가슴이 부흐새의 혀처럼 작아졌다..” … ‘아니, 이게 뭐아

‘ 달빛 아래서라지만 아이가 보기에도 지옥도 는 이상하였다. 룰길히' 휴오르는치혹잔 가운 데의 흙탕물 속에는 스님들만 보였다. 수행은 하지 않고 침을 흘리면 졸고 있는 스님, 바랑 속에 책 대신 돈다발이 들어 있는 스님, 화를 크게 내고 있는 스님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 다.

아이는 비로소 스님들이' 스승 스님을 비난하 는 이유를 알았다. 지옥에 스님들만 있으니 좋 아할 리 없었다.

‘아, 정말 큰일났구나. 주지스님한테 가서 사정해 볼까?’

이런 지옥도라면 스님은 당장 절에서 쫓겨날 지도 몰랐다. 아이는 밤새 궁리를 하였다. 스님 이 절에서 쫓겨난다면 그림을 다시 배울 수 없 을뿐더러 자신은 또다시 장터를 떠도는 거지 아이가 될 것이 뻔했다. 아이는 아버지 같은 스님과 헤어지기 싫었다. 그러나 스님의 고집 을 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스님은 절대로 양보를 안하실 거 야.’

아이 눈에는 밤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아 이는 답답한 마음으로 정말로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먼저 장터 의 코쟁이를 떠올렸다. 술만 취하면 비겁하게 아내를 때리는 코쟁이였다. 그리고 또 생각나 는 사람은 노루목의 개도둑 형이었다. 길거리 에 나온 개를 잡아 개장수에게 팔아넘기는 애 꾸눈이었다. 또한 자기 엄마를 멀리 버리고 온 기와집 부자도 생각났다.

순간, 아이는 벌떡 일어나 물감통과 붓을 들 고 몰래 지옥도가 그려진 법당으로 갔다. 아이 는 곧장 먹물을 듬뿍 찍은 붓으로 스님들의 머 리에 머리카락을 그려나갔다. 이글거리는 불길 이 다가오자 흙탕물 속에서 비명을 지르던 스 님들이 그제야 코쟁이와 개도둑과 건달로 변했 다. 단숨에 머리카락을 다 그리고 나서야 방으 로 돌아온 아이는 깊은 잠에 빠졌다. 법당 추 녀 끝에 매달려 뎅그렁거리는 풍경소리도 아이 를 깨우지 못했다.

법당 마당에 햇살이 내려앉기도 전에 사람들 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소문이 산속에 박혀 있는 암자들을 한바퀴 돈 듯했다. 스님과 신도 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하룻밤 사 이에 바뀐 지옥도의 기적에 살아 있는 그림이 라고 혀를 내둘렀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 는 사람은 지옥도를 그린 스님뿐이었다.

스님은 들고 있던 사리빗자루를 법당으로 들 고 들어가 부처님 무릎 아래에 놓았다. 그러고 는 향을‘피우고 큰절을 세 번 하였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제자가 아니었다. 부처님 의 제자일 뿐이었다.

부디 금고기(금어 : 불화를 잘 그리는 사 람)가 되어 사람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스님 이 되거라.’

절에서의 생활은 산을 드나드는 흰구름처럼 자유롭게 오고가는 법이었다. 스님은 바랑을 맨 채 잠든 아이는 물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 고 일주문을 빠져나왔다.

스님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든 분은 법당의 부처님뿐이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화를 낸 적 이 없는, 늘 미소만 짓고 계시는 부처님이었다.

(정찬주의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4애서)

-심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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