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定)의 의미와 불교의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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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7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4-06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교리/건강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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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15:37 조회 2,126회본문
정(定)의 의미와 불교의 선정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바른 생활이 먼저
불교의 교리와 함께 중요한 것은 교리 의 내용을 실천에 의하여 체득하는 것이 다. 그러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불교에서는 선정을 통하여 교리의 내용 을 체득하고 지혜를 계발하라고 한다. 물 론 바른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에서의 자기 절제와 여러 가지 계행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의 절제와 바른 계행이 없이 선정을 닦는 것은 모레 위에 집을 지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오계 조 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일상생활을 절 제 없이 한다거나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 로 선정을 닦으려 한다면 아집과 독선, 그리고 위선 만이 더할 따름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통 일된 상태로 고요히 머무는 것을 정(定) 이라고 하며, 이러한 수련을 정학(定學) 이라고 한다.
‘정(定)’이라는 말은 사마디(samadhi) 를 의역한 것인데, 음사하여 삼마지(三摩 地) 혹은 삼매(三昧)라고 한다. 이것을 의역해서 등지(等持)라고도 하고, 또 마 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산란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심일경성(心一境 性)이라고도 한다. 보통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마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을 나타내는 말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사마히타라는 말도 있 고, 사마빠티라는 말도 있으며, 이 밖에 도 드히야나가 있으며, 찌타이카그라타라 는 말도 있고 또 사마타라는 말도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정의 성격이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것인데, 너무 전문적 인 용어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선정(禪定)이라는 말은 드히야 나를 음사한 선(禪)이라는 말과 중국의 한자인 정(定)이 합쳐진 것이다. 불교 특 유의 명상법을 포괄하여 일반적으로 선 정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의 삼학 가운데의 정은 사마 디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마디가 가장 포괄적인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 렇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에 요가 (yoga)라는 것이 있다. 요가는 불교 이전 에 바라문교의 시대에서부터 있었던 명 상법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도 그대로 쓰 기도 하는데, 한문으로는 유가(瑜伽)라고 음사한다. 요가라는 말은 불교에서도 정 이나 삼매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그 내용은 바라문교의 요가와 는 차원이 다르다. 밀교에서는 특히 이 유가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예를 들면, 삼밀유가(三密瑜伽)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와 신체 행동, 그리고 정신을 동시에 통제하여 삼매에 드는 것 을 말한다. 선정의 형태는 어느 종교에서든 보편 적으로 나타난다. 요즘은 명상이라는 말 을 많이 쓰지만 이것도 선정의 한 형태 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도의 종교와 사상에서는 이 명상이 선정의 형태로서 특히 강조되고 있다. 인도출신의 명상가 들 가운데에는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사 람들이 많아서 명상의 원조는 인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인도의 선정은 불교보다도 그 기원이 훨씬 오래이다. 인도의 선사 시대의 유물 중에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의 신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인도에서는 명상이 발달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도의 기후나 풍토가 덥기 때문 에 아무래도 휴식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인생과 우주의 신비 등에 대해 사색하고 명상하는 것이 발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 사람들은 고행과 명상을 병행하여 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대한 연구가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도 앞섰는지 도 모른다. 불교에서도 인도의 이러한 명상 내지는 선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불교 이전 에 정식으로 선정이 행해지게 된 것은 대체로 우파니샤드 시대로부 터라고 본다.
그 때에는 선정을 요 가라고도 했고, 후에는 정려(靜慮) 라는 뜻으로 드히야나(dhyana)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이 나중에 중국에 와서 선나(禪那)라고 음사가 되었 고, 그것을 줄여서 선이라고 일컬어 졌던 것이다. 브라만 시대의 말기, 우파니샤드 시대의 초기에는 인도 사회에 계급 제도가 정착되고 바라문들은 4시기 라고 해서 학생기, 가장기, 임서기, 유행기 등의 네 시기에 걸친 일생을 살았다. 그런데 이들은 임서기나 유 행기 동안에 조용한 곳을 찾아 인생 과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고 신에 대해 명 상하면서 선정법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탄생하실 무렵에는 신흥 사문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고행과 함께 바라문들의 여러 가지 선정법을 채 용하여 더욱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인도의 이러한 일반적인 여러 가지 명상이나 선정법을 경험하시고 마침내 독자적인 방법을 개 발하셨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종 교가나 사상가들과 달리 선정 그 자체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하여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불교의 선정은 지혜를 개발하기 위한 것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선정은 외형적 인 모습에서는 인도 일반의 선정법과 유 사하지만 그 내용과 실질에 있어서는 많 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선정 의 우열은 조용한 상태에 들어 마음을 멈추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하여 지혜를 개발하는 데에 목 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의 선정과 불교의 선정이 차이 가 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개발하기 위한 방 법으로 특히 선정을 중시했다. 불교의 출 가승들은 탁발을 나가거나 설법 하는 이 외에는 거의 선정사유를 하였다. 선정이 정신을 통일하여 무념무상으로 되는 점 에서는 기본적으로 비슷하지만, 불교의 선정은 지혜의 힘을 기르기 위한 것에 중점이 놓여 지기 때문에 그 선정심의 내용에서는 다른 종교나 사상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마음을 통일하여 집중하는 선정은 지 혜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정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 쉽게 깨달음 의 지혜가 얻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계·정·혜의 삼학의 구조에서는 먼저 계율을 잘 지켜서 심신의 안정을 이루고 그것에 의하여 정을 실천한다.
그리고 정 의 실천에 의해서 깨달음의 지혜가 얻어 지는 것이며 깨달음의 지혜에 의하여 번 뇌를 끊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열반은 깨 달음의 지혜로부터 생기고 깨달음의 지 혜는 선정으로부터 생긴다고 했는데, 지 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째서 정이 필요한 가를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예를 들면, 등불을 들고 어둠을 비춘다 고 할 때 큰 바람이 불어서는 등불이 꺼 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등불을 바람이 불지 않는 방안에 가지고 들어가면 흔들 리지 않고 잘 비출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어야 지혜의 등 불이 제대로 탈 수가 있다. 마음이 산란 하고 흔들리는 상태에 있어서는 어떠한 생각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집안에 큰 걱정거리가 있으면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다른 일에 열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선정으로서 마음을 고요히 해 놓지 않으면 정신집중이 될 수가 없 고 바른 지혜가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선정이 있어야 깨달음의 지혜가 유지될 수 있다.
순간적으로 나오는 재치가 아니 라 꾸준히 지혜의 등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요동 없는 마음의 상태 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혜 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정이 실천되 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정이라는 것은 불교이전부터 인 도에서 내려오던 일반적인 실천법이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만났던 알라라 카 라마나 웃다카 라마풋트라 같은 선인들 도 선정의 대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정 의 수행은 불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 이외의 인도의 종교나 사상에서는 깊은 선정의 경지를 열반과 동일시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어디까지 나 정은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 에 목적을 두지 선정 그 자체를 목적으 로 삼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선정에 대 해서 불교가 다른 종교나 사상과 다르다 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정에 의해서 깨달음의 지 혜를 얻고 그 지혜의 힘에 의하여 고의 원인인 번뇌를 단절하고 악의 무표업을 남김없이 제거하여 열반에 이르고자 한 다. 그렇기 때문에 정이 아무리 깊은 경 지에 도달해도 그 자체로서는 고로부터 해탈한 것도 아니고 열반에 이른 것도 아니다. 정에 들어 있을 때는 마음이 안 락하여도 정에서 벗어나면 번뇌로 가득 찬 현실로 돌아와 버리기 때문에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깊은 명상에 들어 마음이 정지 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면 선정을 통하여 얻어야 할 지혜도 얻지 못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부처님께서 알라라 칼라마와 웃 다카 라마풋드라에게 선정을 배울 때 선 정의 가장 깊은 단계인 무소유처정과 비 상비비상처정에 이르셨지만 만족하지 못 하고 그들의 곁을 떠나버리신 것도 이러 한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어디까지나 깨달음 의 지혜를 얻는 것을 선정의 목적으로 보며 정의 완성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 거나 열반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 다 른 종교나 사상과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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