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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년의 세월을 견딘 부처님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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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5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2-09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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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화령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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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3 08:34 조회 1,4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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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인도기행 (2회)

이천년의 세월을 견딘 부처님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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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당과 사리탑


3일차 오전인 12월 8일에는 룸비니 오스트 리아 사원 개원 법회에 참가했다. 우리나라에 서는 우리 종단이 유일하게 초청을 받고 종 단 간부와 교도대표들이 축하단으로 참석한 것이다. 이 사원은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등의 유럽 랍텐 센터에서 발원하여 세운 티벳 계 통의 사원으로서 티벳 망명인들의 꿈이 서려 있는 뜻 깊은 곳이다. 근처에 있는 한국 사원 은 벌써 십수 년 째 공사중이다. 바로 앞에 있는 대만절을 염두에 두고 더 크게 짓는다 고 그렇게 늦어진다는데 만약 돈 많은 중국 정부에서 더 크게 지으면 우린 어떻게 할 건 지. 무조건 크면 좋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형주의가 여기에서도 보는 것 같아 좀 씁 쓸해진다. 그저 알맞은 규모로 짓되 한국적 아름다움 을 좀 더 강조하고 많은 불교도들이 단합을 하면 금방 완성할 건데 각자의 생각이 다 틀 리니 아직도 완공되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 야 할 것 같다. 

거기에 비하면 오스트리아 사 원은 티벳 망명객들과 유럽 불자들의 합심으 로 저렇게 단기간에 완공을 한 것이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개원 법회에는 랍텐 센터의 최고 어른인 곤자르 린포체를 비롯하여 네팔 문화부 장관, 룸비니 개발위원회 회장 500여명의 내외 축 하객이 참석했으며 우리와 인연이 깊은 독일 의 거쉰트 씨 부부도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 다. 아침부터 시작한 행사가 두어 시간 정도 면 끝날 줄 알았는데 거의 오후 1시가 넘어 서 끝났다. 곤자르 린포체가 한 시간도 넘게 법문을 한데다가 사원 건립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표창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심지어는 막 노동을 한 사람들에게 까지도 일일이 자전거 한 대씩을 주었는데 무척 인상 깊은 장면이 었다. 차도 없는 이곳에서 네팔 노동자들에게 는 자전거는 큰 재산이자 마을의 자랑거리가 될 성 싶었다. 자전거를 받고 기뻐하는 그들 의 표정에서 행복의 기준이 물질적 부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앙굴리말라의 귀의처와 수닷타 장자의 집터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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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라말라 귀의처


우리는 1시에 점심식사까지 끝내고 쉬라바 스티로 가게 되어있었는데 마음이 조급했지 만 행사 중간에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예정보 다 늦게 룸비니를 출발했다. 

네팔과 인도 국 경을 지나가는데 확실히 십년 전보다 인구가 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십년 전에 인 도 인구가 8억인가 9억이라더니 지금은 12억 이라고 한다. 인플레도 심해서 구걸하는 사람 도 인도 화폐는 받지 않으려고 하고 달러를 달라고 한다. 버스에서는 각자 소개도 하고 불교 이야기 도 하면서 6시간이 걸려 쉬라바스티에 도착 했는데 이곳은 그 옛날 마가다와 쌍벽을 이 루던 코살라국의 수도로서 숱한 일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옛날에는 사밧티라고 했는데 한문으로는 사위성이라고 한다. 특히 기원정 사가 있는 유명한 곳이며 부처님께서는 이곳 에서 24번이나 안거를 지내신 곳이기도 하다. 다음 날인 12월 9일에는 7시에 아침을 먹고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만나 참회하고 깨달 음을 얻었다는 귀의처와 기원정사를 지어 바 친 급고독 장자의 집터를 방문했다. 두 곳이 바로 가까이에 인접해 있었는데 옛날에 세운 탑 자리가 바로 이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굴리말라 집터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 보니 집터가 아니고 살인귀 앙굴리라마가 부 처님을 만나 참회하고 새사람이 된 곳을 기 념하여 세운 터라고 한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이 불교에 무지하여 그 저 편리하게 그렇게 설명했던 것인데 앙굴리 말라 집터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기념탑을 세우고 사원을 세웠는가 이상하게 생각이 들 어 다시 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집터가 아니고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귀의한 장소 를 기념하여 세운 곳이라고 한다. 앙굴리말라는 이곳의 브라만 대신의 아들 이었는데 잘 생기고 총명했다. 스승을 모시고 베다를 배우고 있었는데 스승의 아내가 반하 여 구애를 했지만 앙굴리라마는 거절을 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스승의 아내가 스승에게 앙굴리말라가 자기를 겁탈하려했다고 거짓말 을 했다. 이에 분노한 스승은 앙굴리말라에게 마지막 비전을 전수해 줄테니 1000명의 사람 을 죽여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라고 했다. 갈등하던 앙굴리말라는 진실한 깨달음을 이 룰 수 있다는 스승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사 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제 정신을 잃고 미쳐 버린 앙굴리말라는 마지막으로 자기 어머니 까지도 죽이려는 찰나에 부처님을 만나 바른 길로 들어선다는 이야기이다. 살인죄를 저지 른 사람도 참회를 하면 새롭게 태어날 수 있 다는 유명한 일화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앙굴리말라 귀의터의 건너 편은 수닷타 장자 의 집터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이곳을 기념하 여 탑과 절이 세워졌던 모양이다. 



수닷타 장자의 공양으로 지어진 기원정사 2000년의 세월을 딛고 아직도 굳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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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탓다 장자 집터에서


기원정사를 바친 수닷타 장자는 이곳 쉬라 바스티의 부호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으 므로 급고독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마가다를 방문했다가 죽림정사를 보고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으로 자기도 정사를 지어 바치기로 마 음먹고 코살라로 돌아와 땅을 구했다. 그러나 수닷타가 마음에 들어 하는 땅은 제타라는 왕자의 소유였고 왕자는 황금으로 땅을 덮어 야 그 땅을 팔겠다고 했다. 금화를 수레에 가 득 싣고 땅을 덮는 수닷타를 보고 놀란 제타 왕자는 그 이유를 묻고는 자기도 마침내 그 땅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만들 어진 것이 이곳 쉬라바스티의 기수급고독원, 즉 기원정사였다.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만 나 귀의한 앙굴리말라 유적지와 수닷타 장자 의 집터를 둘러보고 기원정사로 자리를 옮겼 다. 기원정사는 부처님 당시에 가장 규모가 컸 던 정사이며 불교의 교세를 넓히는 근거지가 되었다. 정사가 지어지자 사리불은 부처님보 다 먼저 이 곳에 와서 교화를 했다. 

부처님께 서는 이곳에서 외도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신 통력도 보이고 논쟁을 하시기도 했다. 외도들 은 부처님을 음해하기 위하여 창녀를 고용하 여 부처님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 소문을 내기도 하고 사람을 죽여 기원정사 앞에 버 려 놓고 불교도가 그랬다고 거짓 소문을 내 기도 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이겨내었으며 결국 수많은 바라문들이 불교 에 귀의했고 파세나디 왕도 부처님께 귀의함 에 따라 불교가 이곳에 정착되었다. 그러한 역사가 바로 이 기원정사를 무대로 펼쳐졌던 것이다. 이곳은 2세기 까지 번창하다가 그 이 후에는 쇠퇴했으며 울창한 밀림에 덮혀 있다 가 19세기 말에 서양인들의 발굴에 의하여 그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 발견된 기원정사 터는 남북이 457미터, 동서 가 152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기원정사에는 부처님 당시에 사용했다는 우물터도 있고 아 난다 보리수나무도 있다. 부처님이 우기 동안 에만 기원정사에 머무시는 것을 애석히 생각 하여 부처님께서 더 머무시도록 하기 위해 아난다가 보리수나무를 심을 것을 부처님께 건의했으며 이때 목건련이 신통력으로 보드 가야에 가서 묘목을 옮겨 왔다고 한다. 나무 들로 둘러싸인 기원정사 주변의 분위기가 조 용하고 숙연해서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바 쁜 일정 때문에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셨 다는 설법터에서 반야심경을 외운 다음 천불 화현탑으로 향했다. 천불화현탑은 부처님께서 이교도들을 설복 하기 위해 천불로 화현하셨다가 돌연 자취를 감추시고는 석달 동안 어머니인 마야 부인과 그곳 천신들에게 설법하시기 위하여 도솔천 에 오르신 곳이라고 한다. 아니룻다가 도솔천 을 방문하여 다시 내려오시라고 청했기 때문 에 부처님께서는 상카시야라는 곳으로 하강 하셨다고 한다. 상카시야도 8대 성지 중의 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곳은 너무 멀고 볼 것도 별로 없다고 해서 이번에는 방문하지 못했다. 천불화현탑은 아주 높은 언덕을 이루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 위에 유적들이 남아있었다. 이곳의 정상에 오르면 주위가 한 눈에 내려 다보이는데 이런 평원 지대에 여기만 이렇게 불쑥 솟아 있어 도솔천에 오르셨다는 전설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부처님의 반열반지 쿠시나가라 열반상과 사리탑이 말없는 설법을 


다음에는 쿠시나가라로 향했다. 일찍 출발 했기 때문에 다행히 해가 넘어가기 전에 열 반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 샬리에서 아난에게 3개월 뒤에 완전한 열반 에 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병들고 지친 몸 을 이끌고 이곳 쿠시나가라까지 걸어오셨다. 

금세공을 하는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으시 고 심한 복통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춘다를 위로하면서 마지막을 준비하셨다. 왕사성이나 사위성 같은 큰 도시를 버리고 이렇게 궁벽한 시골까지 오셔서 입멸하신 것 은 사리 분배 때문에 큰 싸움이 일어날까봐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법에 의지하여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최후의 말씀을 남 기신 부처님께서는 싸라 쌍수 아래에 자리를 깔고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조용히 눈을 감 으셨다.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중생 교화를 하시 다가 길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이곳에는 부처 님의 입적을 기념하여 세워진 탑이 있는데 아쇼카왕이 처음으로 세웠다고 한다. 탑 옆에 는 열반상을 모신 열반당이 있는데 이 열반 당은 두 미얀마 스님에 의해 1920년 경에 세 워졌다고 한다. 안에 모신 열반상은 5세기 경 에 조성된 것으로 길이가 6미터 정도 되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불자들이 경배한다. 신심 깊은 불자들은 열반상에 금박을 붙이 고 절을 하며 경전을 외 우면서 불상 주 위를 돈다. 

우리도 열반상 주위를 돌면서 반야심경을 외 웠다. 이곳 주위는 상당히 넓어서 공원 같은 분위 기가 났으며 그 때의 그 나무는 아니지만 사 라 나무가 나란히 늘어 서 있는 사라 쌍수도 보였다. 사라 나무의 열 매로 만들었다는 염주 는 흰 색깔이었는데 질 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 중 몇 사람이 관심을 보이 자 염주를 파는 사람들 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제대로 구경을 못할 지 경이었다. 모두들 선물 용으로 한 꾸러미씩 사 들고 겨우 빠져 나왔다. 값이 싸기 때문에 생 각 같으면 다 사주고 싶었지만 실이 약해서 꿰는 일이 더 힘들 것 같아 더 못샀다. 열반당과 약간 떨어진 곳에는 부처님을 화 장한 화장터가 있고 그것을 기념하여 큰 탑 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의 이름은 람바르 탑 이라고 하는데 말라족의 왕들이 즉위식을 거 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탑도 역시 아쇼카 왕 때에 크게 보수되었다. 쿠시나가라 주변에는 춘다의 집터라든지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을 떠서 올린 아난다 개천,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 터에 있는 마타 카울 사원 등이 있다는데 짧은 일정상 모두 둘러보지는 못했다. 언제 천천히 이곳을 둘러 볼 기회가 다시 오기를 바라면서 호텔로 돌 아왔다. 

5일째인 12월 10일에는 아침 공양 후 제2차 경전 결집지이자 유마 거사의 고향이라는 바 이살리로 갔다. 쿠시나가라에서 바이살리 까 지는 300킬로미터 쯤 된다는데 도중에 에정 에 없던 곳도 구경하고 점심까지 먹어가며 9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인도의 길은 아직도 그리 좋은 편이 못되어 시간이 지체된다. 가 는 도중에 보면 인도인구가 늘었다는 걸 확 실히 알 수 있다. 10년 전에는 그래도 시골 마을이 제법 한산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 디를 보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대책 없이 인 구만 늘어나는 인도,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바이샬리로 가는 도중에 케사리아라는 곳에 들렀다. 이곳은 예정에 없던 곳인데 발우탑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마을길을 조금 걸어 들어 가면 벌판 한 가운데에 벽돌로 쌓은 허물어 진 스투파가 보인다. 인도의 불교 유적지는 대부분이 붉은 벽돌로 쌓은 것이 많은데 발 우를 엎어 놓은 것처럼 모두들 모양이 비슷 하다. 힌두교 유적들은 돌로 된 것도 많은데 보드가야의 대탑을 제외하고는 불교 유적은 하나같이 벽돌로 탑은 쌓은 것으로 모양이 비슷하다. 이 탑도 그런 것들과 비슷했는데 하단부가 만다라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 표지판이 없어서 도대체 이 장소가 무슨 장소인지 불분 명하다. 가이드도 정확하게 설명을 못해준다. 인도의 역사가 그렇듯이 대부분의 유적들도 설명이 불분명하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정 말 이 장소가 정확한 곳인지 도무지 모호하 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도를 다녀와서 는 미련이 남아서 또 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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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정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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