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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전파의 요람 바이샬리와 라즈기르 옛날의 영화를 세월 속에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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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6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3-03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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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화령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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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8 08:32 조회 1,9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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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인도기행 (3회)

불법 전파의 요람 바이샬리와 라즈기르 옛날의 영화를 세월 속에 묻고

여행 5일차인 12월 10일 케사리아라는 곳에 들렀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그런데 인도의 불교유적지의 대부분이 이처럼 모호한 점이 무척 많다. 케사리아의 발우탑도 규모는 상당 히 컸지만 이곳이 정확하게 어떤 장소였는지 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께 처음으로 선정을 가르쳤던 알라라 칼라마와 풋다카 라마풋다 등을 만난 곳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 은 부처님의 입멸을 예언 하신 곳이라고도 한다는데 특히 전자의 설명은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다. 시시한 외도 스승을 만난 것을 기념하여 이런 큰 탑을 세웠을 리는 없고 부 처님과 아난다가 열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 다. 혹은 춘다의 공양을 받으셨던 곳은 아닌 지? 설명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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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정사에서


아무래도 부처님께서 열반을 예언하시고 쿠시나가라로 가는 도중에 이 탑이 있기 때 문에 부처님의 열반과 관계가 있는 무슨 장 소인 것 같다. 귀국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보 았지만 이 발우탑에 대한 설명은 없었는데 나중에 인도에서 나온 어떤 안내책자를 보니 이름이‘케사리아 불교탑’이라고 되어 있고 인도의 5대 성왕의 하나이며 불교도였던 벤 차카르바르티라는 왕이 원래 불탑이 있었던 자리에 7세기 경에 이렇게 큰 탑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가 가서 본 것은 안내서에 나온 사 진보다 훨씬 더 허물어져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급속히 파괴된 것이다. 불교 유적지가 이렇게 방치되어 허물어지고 있다 니 가슴 아픈 일이다. 인도가 힌두 국가이다 보니 인도의 불교유 적지는 이처럼 대체로 관리가 잘 안되고 불 분명한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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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제자들이 수행했다는 동굴, 영취산의 중턱에 있다.


아쇼카왕 석주처럼 뚜렷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막연한 추측밖에는 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유적지의 설명도 불교 전문가가 쓴 것 같지 않아 수긍이 안가는 부분도 더러 있 는데 전반적으로 불교유적지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도가 이 런 데까지 신경 쓰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 려야 할 것 같다. 의식주의 해결이 어느 정도 되고 삶이 안 정되었을 때 문화에도 눈을 돌리는 것인데 인도가 아직은 먹고 살기 바빠서 이런 데까 지 세세하게 손길을 뻗치기가 쉽지 않은 모 양이다. 여유가 있는 불교국가가 앞장서서 발 굴도 하고 장소에 대한 고증도 하고 그랬으 면 좋으련만. 어쨌든 이런저런 궁금한 것이 많아 미련이 남는 인도이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이런 모호한 곳들을 좀 더 세밀히 살 펴 보고 싶다.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 한 곳 바이샬리 암바팔리의 망고 동산이 있던 곳 점심을 먹고 다음으로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이샬리였다. 옛날에는 이곳을 베살리라고 했는데 부처님 당시에는 상업이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고 한다. 베살리, 즉 바이샬리는 릿 차비 족이 세운 밧지 국의 수도였는데 릿차 비 족은 세계 최초의 공화국을 세웠다고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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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길, 피로를 푸기 위하여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다.


여기에는 불교 3대정사의 하나라는 대림 정사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 가야에서 깨 달음을 얻으시고 5년 뒤에 이곳 바이샬리로 오셨다고 한다. 그 때 릿차비 족들은 수 많은 코끼리가 끄는 금으로 장식된 수레를 타고 부처님을 마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바이 샬리의 아름다움을 여러 번 칭찬하셨으며 밧 지 국의 건실함에 대하여 자주 칭찬하셨다. 빔비사라왕이 밧지국을 치려고 했을 때 밧지 국 사람들의 단결력과 여러 가지 뛰어난 점 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침공을 멈추게 한 이 야기가 경전에 있다. 또한 이곳은 이모이자 양모였던 마하파자 파티 고타미와 부인이었던 야쇼다라 등 석가 족 여인들 500여 명이 귀의했던 곳이기도 하 다. 이들은 부처님의 세 번에 걸친 거절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황색 가사를 걸치고 출가를 간청하러 카필라바스투로부터 이곳까지 울면서 따라 왔다. 결국 아난다의 중재로 이들이 출가를 허락 받음으로서 최초 의 비구니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 곳 대림 정사터에는 부처님의 사자상 석주가 높이 서 있고 스투파가 있다. 높이 11 미터의 이 석주는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마 지막 설법 장소를 기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자상이 열반지인 쿠시나가라를 가 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자상이 매우 정교하 고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석주에 아쇼카 왕의 조칙이 새겨져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석주의 하나로 본다고 안내판에 써 있었다. 또한 어느 땐가 부처님께서 이곳에 오시니 원숭이가 발우를 받아들고 꿀을 따서 바쳤다 는 전설도 있고 시원하게 지내시도록 토굴을 만들어 바쳤다고도 한다. 또 다른 불교 성지 인 산치에 있는 대탑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스 투파는 원숭이가 꿀을 따다 바친 곳을 기념 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름이 원왕봉밀지, 즉 원숭이 왕이 꿀을 따서 바친 곳이라고 한. 또 여기에는 원숭이 못도 있는 데 이것은 원숭이가 부처님께서 시원하게 지 내시도록 굴을 파서 바친 곳을 기념하기 위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작은 연못이 었으나 여러 왕조를 지나면서 보강되었다고 하는데 매우 좋은 돌로 주위를 쌓아서 보기 가 좋다. 

근처에는 많은 외국 순례자들이 삼 삼오오 모여 기도를 하거나 염불을 하고 있 었는데 무척 진지해서 경건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이곳은 또한 암바팔리가 출가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암바팔리는 궁중의 댄서 출신으로 서 이름난 유녀이기도 했다. 릿차비 족의 귀 족들이 암바팔리보다 먼저 부처님을 모시고 자 했으나 부처님께서는 먼저 약속한 암바팔 리의 청대로 그녀에게 공양의 우선권을 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계 급의 어떠한 사람도 평등하게 대하셨다는 것 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암바팔리는 나중에 출 가하여 높은 경지에 올랐으며“나의 노래는 숲속의 새처럼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갈라지 고 쉰 소리가 나네. 하지만 내말은 진실하다 네”라고 하는 게송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부 처님께서는 쿠시나가라로 가시는 도중에도 이곳 암바팔리 동산에 들러서 설법을 하셨다 고 한다. 암바팔리 동산은 암바팔리가 부처님 께 공양한 망고나무 동산이었는데 마지막 설 법을 이곳에서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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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산 독수리 바위, 독수리가 막 날아오르려는 모습이다.


어디가 정확히 암바팔리 동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근 처 어디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 역시 바이샬리에 있는 곳으로서 부처님 사리탑이 있던 곳이다. 이곳 에서는 부처님 성체를 화장한 후 릿차비 족 이 얻어간 사리를 모셨던 탑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둥근 지붕을 덮어 높았다. 부처님 사 리는 화장 직후 팔등분 하여 각 나라와 부족 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는데 릿차비 족도 그 중의 일부를 얻어 이곳에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1958년도에 돌로 된 사리함을 열어 보 았을 때는 재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이외 에도 구슬 두 개와 황금 잎사귀, 동전 등이 함께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파 트나 박물관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또한 유마거사의 집터라고 가이드 가 말해줬는데 현지의 안내판에는 그런 이야 기는 없었다. 아마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이곳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 겠다. 바이샬리 구경을 마치고 파트나를 지나 라 즈기르로 이동했다. 

파트나는 바이샬리에서 60㎞ 쯤 떨어져 있다. 파트나를 지나면 도중 에 5.5㎞나 되는 마하트마 간디 다리가 있다. 파트나는 현재 비하르주의 주도이고 상당히 큰 상업도시이다. 넓디 넓은 갠지스 강에 놓 여진 이 다리는 정말 길었다. 갠지스 강이 지 금은 물이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우기에는 정말 볼만한 광경일 것이다. 차안에서 이야기 도 나누고 인도 풍경을 내려다보며 감상하는 사이에 어느덧 라즈기르에 닿았다. 레지던시 호텔이라는데에 여장을 풀었는데 호텔 앞쪽 으로 영취산이 보이고 넓게 펼쳐진 들판도 한 눈에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했 는데 오늘 하루는 정말 길고도 짧은 느낌이 든다. 구경도 재미 있었고 차를 타고 오며 가 는 도중에도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인도의 색다른 풍경들을 감상하느라 무척 긴 하루 같았는데도 시간은 금방 흘러 갔다. 영취산과 죽림정사로 유명한 라즈기르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 숱한 불교의 전설이 서린 곳 순례 6일차인 12월 11일 토요일에는 라즈기르에 있는 불적들을 돌아보았다. 

라즈 기르는 옛날에는 라즈그리하 라고 하였으며 왕이 거주하 는 곳이란 의미가 있어 한문 으로는 왕사성이라고 한다. 경전의 무대로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곳이 바로 이곳 왕 사성이라고 불렸던 러즈기르 이다. 라즈기르는 다섯 개의 산 이 둘러 싸인 분지로서 부처 님 당시에 가장 강성했던 나 라인 마가다의 수도였다. 그 당시 마가다의 왕은 빔비사 라로서 부처님의 가장 든든 한 후원자였다. 부처님이 출 가하시고 이곳에서 탁발을 다니실 때 빔비사라왕이 그 의젓한 풍모에 반해서 나라 의 절반을 줄테니 같이 손을 잡고 나라를 다 스리자고 했지만 부처님께서는 나는 생노병 사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큰 깨달음을 위해서 출가했으므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 다고 정중히 거절하셨다. 이에 빔비사라왕은 무척 아쉬워하면서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되시거든 꼭 자기를 찾아와 설법을 들려달라고 하는 이야기가 경전에 실려 있다. 라즈기르에는 또한 빔비사라왕이 보시한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가 있다. 

그리고 이곳 은 부처님께서 입멸을 예언하시고 쿠시나가 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신 출발지이기도 하 다. 또한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처음으로 경전 의 결집이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래저 래 이곳 라즈기르는 불교의 역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을 꼽으라면 역시 죽림정사와 영취산일 것이다. 우리는 먼 저 영취산에 가기로 했다. 영취산은 분지의 동남쪽 비탈에 있었는데 영취산 아래에 도착 하자 우리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매우 붐 볐다. 각 나라에서 몰려든 참배객들 과 장사꾼들의 호객 소 리에 정신이 없 었다. 영취산 산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십년 전에 왔을 때보다 더 넓혀져 있었는데 그다지 보 기가 좋지 않다. 예전에 왔을 때는 그나마 호 젓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도 저도 아 니다. 더구나 올라가는 왼쪽 편으로는 일본불 교에서 일찍부터 절을 짓고 산에 기둥을 세 우고는 리프트를 설치해 놓았는데 아주 흉물 스럽다. 

일본의 어떤 특정 종파에서 세운 것 인데 어디서나 발 빠른 일본인들의 행보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올라가는 도중에는 부 처님과 제자들이 머물면서 수행했다는 동굴 도 볼 수 있었고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뵈 러 왔을 때 수레를 세웠던 곳도 있었다. 그리 고 여기저기에 티벳 불교도들이 걸어 놓은 오색 깃발도 보였다. 영취산의 산정에는 마치 독수리가 막 날아 오르려는 듯한 모양을 한 바위가 있는데 영 취산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축산이라고 잘못 읽는 사람들도 많은데 영 취의‘취’자는 분명히 독수리‘취(鷲)’이다. 

영취산은 또한 법화경 설법의 무대이기도 하 다. 법화경 서품에 보면 1200명의 비구들이 여기에 모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은 120명 도 모이기 어려운 자리이다. 10년 전에 왔을 때는 여기에 보시함을 놓고 총 든 군인 2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영취산의 독수리 바위 옆에는 시멘트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너무 바싹 올려붙여 놓아 독수리 바위의 운치가 없어졌 다. 불심이 없는 인도인들이 불교 유적에 손 을 댄답시고 해 놓은 것이 모두 이렇게 조악 해져 버린다. 차라리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놔 두는 게 오히려 더 나을 성 싶다. 

이런 볼썽 사나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2500 여년 전에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왕사성을 내 려다보며 생각에 잠기시기도 하고 제자들에 게 설법도 하시던 광경을 억지로 떠 올려 보 면서 산정을 내려 왔다. 

지금은 키 작은 잡목 으로 덮혀서 아무도 살지 않는 골짜기이지만 저 아래가 그 옛날 번성했던 왕사성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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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사리아의 불탑, 굉장히 규모가 크지만 관리 소홀로 거의 허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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