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와 원력으로 부처님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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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2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5-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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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5-02 15:44 조회 1,713회본문
부처님의 가르침이 만고에 불변 없이 항상하듯, 선대 스승님들이 설파하신 법문 또한 세월이 흘러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편과 우리가 직면하는 고민에 대한 해법을 주고 있다. 법문의 지혜와 가르침을 되새기며 기리고자 이번호부터 ‘이달의 법문’을 대신할 ‘왕생법문’ 코너를 신설했다. ‘왕생법문’은 스승님들이 종단 내외에서 글로 작성하신 법문과 법회에서 설하신 녹취록 등을 인용·서술 또는 재구성하여 매달 한편씩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천수경』 십악참회(十惡懺悔)
살생(殺生)중죄 금일참회
투도(偸盜)중죄 금일참회
사음(邪淫)중죄 금일참회
망어(妄語)중죄 금일참회
기어(奇語)중죄 금일참회
양설(兩舌)중죄 금일참회
악구(惡口)중죄 금일참회
탐애(貪愛)중죄 금일참회
진애(塵埃)중죄 금일참회
치암(痴暗)중죄 금일참회
불자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에서 부처님을 제대로 맞이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참회이고, 둘째는 원력이며, 셋째는 실천입니다. 참회란 지나간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것이요, 원력이란 불자로서의 보다 분명한 목적의식이며 실천이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바라밀행입니다.
불자여러분! 참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참사참(理懺事懺)이라 하여, 이치적으로도 참회하고 행동적으로도 참회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본질적 참회를 이참이라고 하고, 현실적 참회를 사참이라 합니다. 현실적 참회에는 크게 열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정당하고 올바른 행위를 통해 무한한 과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어온 열 가지 악업을 참회하는 것을 십악참회라고 합니다.
사참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숱한 시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생명을 해쳐 왔습니다. 이 모든 죄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참회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살생의 죄업을 참회하는 데서만 그칠게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내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중생들은 숱한 시간 속에서 알게 모르게 남의 소유물을 훔쳐왔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은 바야흐로 우리가 불자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그 시작일 것입니다. 내 소유물이 소중한 것처럼 남의 소유물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 그리고 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가족애를 저버린 죄업들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사음죄라고 합니다. 사음죄란 일차적으로는 남편에게 있어서는 아내가, 아내에게 있어서는 남편이 상대방을 배신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배신하고 자식이 부모를 배신하는 것도 일종의 사음이지만 이는 이차적 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소중함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 남편 의 소중함을 느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사음죄를 참회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숱한 시간 속에서 많은 거짓말을 해 왔을 것입니다. 이를 참회하는 것이 거짓말의 참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이를테면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해서 혹세무민하는 것을 최대의 거짓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세상을 살다보면 정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를 불교(유식학)에서는 아첨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익과 명성에 집착하는 자가 진정으로 있었던 과실을 숨기는 것으로 탐욕과 어리석음의 일종입니다. 이른바 속은 텅 비었으면서도 겉으로 말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대는 것은 남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이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서 불의를 보면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섯째, 이간질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간질이란 이미 두루 아시다시피 잘 어울리고 있는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곱째, 악담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인들은 한결같이 입은 재앙의 문이니 잘 막아 다스려야 한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네 가지 중생의 교화법(四攝法) 가운데 ‘부드러운 말로써 교화하라(愛語法)’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덟째, 불자여러분! 우리는 숱한 세월에 걸쳐 분수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왔습니다. 명심보감에서는 ‘아무리 큰 집이라 해도 밤에 잠자기 위해 눕는 데는 여덟 자 반이면 넉넉하고 아무리 좋은 전답이 일만 이랑이나 된다 해도 하루 두되면 식량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욕심 때문에 분배의 원칙을 어기고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 입니다. 욕심을 비우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끝없는 욕망의 참회라 할 것입니다.
아홉째, 우리는 숱한 시간에 걸쳐 아주 사소한 것에 있어서도 참지 못하고 벌컥 성을 내왔습니다. 아내와 남편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동료와 동료 간에 사소한 것 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왔습니다. 성을 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존심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 입니다. 마음을 텅 비우고 나면 지나친 자존심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자존심 하나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존심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러기에 진정한 참회는 남의 자존심을 존중하여 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열째,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대승정법, 참되게 수행하는 사람을 비방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합니다. 사이비 종교라든가, 잘못된 견해에 빠져 있음도 어리석음 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모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합니다. 불법의 참진리를 모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악참회를 통해 마음속에 자리했던 온갖 찌꺼기를 말끔히 가셔내는 공부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부처님을 맞이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게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른바 원력입니다. 원력이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뚜렷한 목적의식입니다. 이 목적의식은 어쩌면 참회보다 우선한다고 할 것입니다.
불자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준비하는 자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을 그릇에 담고자 한다면 적어도 물을 담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부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로 그동안 잘못 살아온 죄업들을 참회하고 그 마음에 크나큰 원력을 세웁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불자가 됩시다. 총기 35년 12월 총지종보 85호 <이달의 설법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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