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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빈 강씨 (1611〜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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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5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12-05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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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06:09 조회 2,20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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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빈 강씨 (1611〜1646)
규제와 편견의 한계를 넘어 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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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인조15년) 조선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 고 난 뒤 소현 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청의 볼모로 잡혀 간다. 세자빈 강씨 27세, 세자나이 26세, 시 동생 봉림대군 19세 때였다.  세자빈 강씨는 가마 속에서 처음으로 조선의 북방산천을 보았다. 세자빈으로 간택 된 후 10년 동안 구중 궁궐 깊은 곳을 세상의 전부로 알던 강 씨는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지나 심양에 도착 했 다. 도착한 곳은 심양 궁궐 근처의 심양 관 이었는 데 이곳은 사실상 주청 조선 대사관이었다. 이곳에서 소현 세자는 청나라와 직접 상대하 기를 꺼리는 인조를 대신해 많은 일을 수행했다. 청나라 파병요구에 응하고 반청 활동을 하다가 끌려와 재판 받는 ‘김상헌’ 같은 인사들을 보호 하 는 것도 큰일 중의 하나였다. 세자빈 강씨는 심양 관 생활을 저주하며 보내 지는 않았다. 

심양 관 생활에는 소현 세자와 단둘 이 있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세자는 원래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인조가 처음 세 자빈 간택령을 내렸을 때 삼 간에 포함되었던 윤 의립의 딸 윤씨 소녀였다. 세자는 한번 보고 마음 에 들어 했으나 남인이라는 이유로 간택에서 탈 락하고 말았다. 이런 사건이 있은 2년 후 승지 강석기의 딸 강 씨 소녀가 세자빈에 간택된 것이니 세자와 사이 가 원만하기는 쉽지 않았다. 세자빈 강씨의 진가는 심양 관에서 나타났다. 인질생활을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만 보내지 않 았던 강씨를 소현 세자는 깊이 신뢰했다. 

세자빈 강씨는 심양 관 생활을 자신과 조선 운명의 전기 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소현 세자가 정치적 일들 에 몰두하는 동안 세자빈 강씨는 심양 관의 경제 문제 해결에 나섰다. 심양 관에 정착한 조선인 일 행은 192명이었는데 이 대 식구의 식생활을 해결 하는 것 자체가 큰 일이었다. 그 당시 심양의 남 탑 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 을 구해 낼 수 있었다. 강 빈은 이들을 구할 수 있 는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물품부족에 시달리는 청나라 지배층의 두둑한 지갑을 조선의 질 좋은 물품과 연결시켜서 큰 돈을 벌어들였다. 무역을 통해 경제에 눈을 뜨던 인조19년(1641),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청나라에서 농사짓기를 권유해온 것이다. 

심양 관의 신하들은 농사를 짓 게 되면 영원히 조선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 해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강 빈의 생각은 달 랐다. 농사에 익숙하지 못한 유목민족의 땅에서 우수한 농법으로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을 것으 로 판단한 것이다. 청나라는 적지 않은 농토를 제 공해 주었다. 처음에는 한인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심양 장계’에 따르면 인조 20년 에 거둔 곡식은 3319석이나 됐다. 강 빈은 점차 한인 농군을 노예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으로 바꾸 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조선인들은 더 열 심히 일 해서 수확물은 더욱 많아졌다. 무역만 하 던 단일 체제에서 생산과 무역을 겸하는 복합체 제로 발전했다. 강 빈은 인질생활을 좌절하는 대신 대규모 영 농과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소현 세자가 서 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변화였다. 이제 이들 부부가 귀국해서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되면 조선은 변화할 것이 다. 그러나 인조는 이런 강 빈과 소현 세자를 의심 했다. 그는 강 빈이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폐한 후 소현 세자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인 조 21년 6월 사망한 강 빈의 아버지 강석기의 빈 소에 가는 것 조차 막았다. 인조의 가혹한 조치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소현 세자 부부를 정적으 로 바라보는 인조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무려 9년간의 인질생활이 끝났을 때 심양 관 에는 곡식 4천7백석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세자 빈 강씨의 경영 수완을 잘 알 수 있었다. 강 빈은 이런 경영수완으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결 심했으나 세자가 귀국 두 달 만에 독살되면서 엉 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인조는 원손 석철을 폐 한 후 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후사로 결정했다. 인조의 칼날은 다시 세자빈 강씨를 향했다. 

인조 는 안사돈이었던 세자빈 강씨의 어머니와 두 오 빠 강문성과 강문명도 사형시키고 세 아들을 제 주도로 유배 보냈다. 세자빈 강씨의 죽음은 이후 선비들의 끊임없 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 문제를 거론했다가 다 치는 사람도 있었다. 송시열 등이 계속 세자빈 강 씨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등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자 숙종 44 (1718)년에 복위되었다.  세자 내외의 꿈과 좌절은 그야말로 조선의 꿈 과 좌절이었다. 조선을 개혁의 나라, 개방의 나라, 실용의 나라 로 만들려던 꿈이 좌절 된 것이다. 세자빈 강씨의 죽음은 시대를 앞서 나갔던 실 용주의 여성 경영자의 죽음이자 그가 만들려던 개발의 나라, 실용의 나라는 꿈으로 막을 내렸다.

                               

자료-여성사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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