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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것은 바로 백성들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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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9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4-03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편집위원회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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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6 10:59 조회 2,2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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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것은 바로 백성들의 힘이었다.
천안 독립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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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다. 3월은 뭔가 특별한 의미를 주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새봄의 시작을 누구나 3월쯤으로 알고 있고, 학생들의 새 학기도 3월에 시작한다. 편집위원회도 길었던 겨울을 벗어 버리고 새봄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3월 취재에 나섰다. 3월의 첫날은 국경일이다. ‘삼일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날이다. 1919년 일본의 무단통치로 고통 받던 시절,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번져나간 백성들의 독립운동이다. 위원들은 그날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독립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찾아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천안 독립기념관, 서울지역에서 모인 8명의 위원들은 각자 취재 장비를 점검하고 3월 22일 오전 10시 독립기념관으로 출발했다.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아 국민들이 세운 전당


서울에서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시간에 위원들은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당도했다.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병천읍 아우내 장터와 인접한 곳이다. 교통은 독립 기념관 개관과 동시에 경부고속도로 지선이 개통되어 차량 이동이 쉽다. 주차장에서 잠시 자세를 가다듬고, 정문으로 이동하니, 입구에 높이 51미터의 ‘겨레의 탑’이 우리를 맞는다. 너른 광장 저편으로는 겨레의 집도 눈에 들어온다. 족히 1,500 미터는 떨어져 있지만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여기서 보는 집의 크기가 저 정도이면 얼마만한 크기일까? 겨레의 집은 독립기념관의 상징 건축물이다. 높이 45미터(건물 15층), 길이 126미터, 폭 68 미터로 축구장 넓이 정도의 면적이다.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현대적으로 지어진 맛배지붕의 기와집이다. 북경의 천안문 보다 그 규모가 커 동양 최대의 기와 건축물이다. 이곳은 광복절 기념행사 등 중요행사장으로 주로 쓰이고, 건물 중앙에는 총 274개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불굴의 한국인상’이 자리한다. 겨레의 집 뒤편으로 7개의 전시관이 있다. 제1관 ‘겨레의 뿌리관을 시작으로 우리민족의 국난극복과 일제로 부터의 독립의 과정을 순서대로 관람 할 수 있다. 독립기념관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87년 8월 15일 광복절에 개관했으니 올해로 벌써 25년이 되었다. 독립기념관 조성 사업은 한마디로 한민족의 대역사였다. 당시 이 땅의 국민으로 벽돌 한 장 값 이상의 성금을 냈던 것은 다 아는 일이다. 

모두가 내 집을 짓는다는 일념으로 동참했다. 사실 독립기념관 조성의 발의는 해방 직후부터 있었다. 1945년 사회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회관에서 ‘독립기념관 건설준비위원회’가 발족한다. 하지만 당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로 공론화 하지를 못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75년에도 독 립 운 동 사 편 찬 위 원 회 가 주 최 한 ‘광복30주년기념심포지엄’에서 정식 안건으로 토의, 합의하고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독립기념관 건립 논의에 불을 다시 지핀 것은 1982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 그 발단이 된다. 분노한 국 민 들 은 역 사 의 한 편 으 로 묻 혀 있 던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를 다시 발족한다. 정부는 이에 천안군 목천면 일대 400만㎡를  제공해 본격적인 건립 사업을 추진한다. 1986년 4월까지 해외동포를 비롯한 국민 성금으로 490억 2432만 5009원이 모금 되었고, 전시를 위한 유물, 자료 7만 여점이 모이게 된다.  다시 찾은 나라의 독립기념관을 그야말로 국민들의 손으로 건립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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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찾기 위한  백성들의  피나는 노력


겨레의 집을 뒤로 돌면 7개의 전시관이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위원들은 제1관부터 돌아보며 우리 민족이 외침에 항거한 역사와 그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으로부터 조선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의 역사는 수없는 외침을 이겨낸 항거의 역사였다. 서양문물과 제국주의가 밀려오던 구한말의 역사는 하루하루 격변의 나날들이었다. 청나라, 러시아, 일본, 미국 등 강대국들은 조선반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위한 끝없는 패권다툼을 벌인다. 

드디어 이 땅의 국모마저 시해하고, 동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1910년 식민지로 불법 병합한다. 무력한 왕조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한 부패한 관료들은 앞 다투어 일본의 식민지 병합에 앞장선다. 당시 애국지사들은 자결로서 항거했지만, 이미 조선의 모든 것을 장악한 일본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서 일본의 강제 통치에 저항하는 백성들이 날로 늘어만 갔고, 드디어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조선 반도 전역은 독립만세 운동으로 물결친다. 당황한 일제는 무력 강압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고, 독립을 염원하던 많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조국을 떠나 만주로, 미국으로 둥지를 옮긴다. 제3 전시관 한 귀퉁이에서 위원들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한분의 애국지사를 만났다.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고종 당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7형제 중 4남이다. 

그는 일본의 강제 병합을 맞아 가진 재산 모두를 처분하고, 모든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이다.  1867년 한성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우당 이회영은 어려서부터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죽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면천 시켜주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누이동생이 어린나이에 과부가 되자 거짓으로 부고를 내고 재가를 시킨 일은 그의 개방된 생각을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많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였고, 장훈학교와 공옥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우당은 1910년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립하기로 마음먹고, 전 재산을 급히 처분하고 일가 60여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다. 우당은 만주 지린에 터를 잡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이후 이 학교는 독립운동 무장 투쟁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을 배출한다. 우당을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아나키스트’다. 무정부주의자를 이르는 말이다. 우당이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동생 이시형과 함께 참가한 우당은 항상 걱정하였던 임정 주도권 싸움을 목격한다. 이미 일본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의 저술에 크게 감동받은 우당은 임시정부를 미련 없이 떠난다. 그는 1925년 비밀결사조직인 ‘다물단’과 한중일 아나키스트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의장으로 취임한다. 또한 행동대인 ‘흑색공포단’을 결성,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1928년에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결성한 ‘동방무정부주의자’ 연맹 창립식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한다. 아시아 각국의 아나키스트들과 활발한 항일 독립운동을 벌리던 우당은 1932년 일본 밀정의 제보로 상해에서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재판도 없이 교수형에 처해진다. 우당의 삶이 힘겨웠던 만큼 그를 따라 만주로 갔던 형제들도 고난의 길을 걷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한성을 떠난 6형제 중 5명은 중국에서 병사하거나 실종되었고,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에 오른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의 양반들 포섭하기 위해 ‘조선귀족령’을 반포한다. 이것은 병합에 협력한 양반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부부동반 일본여행을 시켜주며 기득권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다. 

일제는 권문세가 80명에게 달콤한 유혹을 했다. 그리고 그중 단 6명만이 이를 거부했다. 이회영 일가도 단호히 거절했다. 모든 권위와 기득권을 버리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전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이국의 감옥에서 숨져간 이회영 일가. 그들이 고결한 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독립된 국가의 국민들은 가진 자들의 비리나 권력의 부패를 바라볼 때마다 우당 이회영일가를 떠올린다. 그들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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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도 역사이다.


일곱 개의 전시관을 차례로 둘러본 위원들은 우리가 모르고 놓쳤던 독립에 관한 기록들을 많 이 만났다.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를 비롯해 나라 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던진 수많은 독립 투사들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을 나와 태극기 광장을 둘러보며 우리 교도들이 마음 놓고 수행 할 수 있 는 것도, 조국 독립을 서원한 많은 민중들의 노력 덕분이라 생각했다. 야외에도 많은 전시물들이 있었는데 마지막으 로 관람한 곳은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이다. 

지난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 박물관으로 쓰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역 사적인 이벤트가 있었다. 그때 철거하고 남은 각 부분의 부재를 모아 공원으로 조성 전시하는 공간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 제잔재철거를 주장했다. 행정 당국의 용어부터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그리고 대표적 인 일제 통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총독부 건물 을 철거하기로 하고, 광복절 기념식에서 첨탑을 기중기로 내리는 장면을 연출한다. 당시 철거를 주장하는 측과 이전 보전하자는 측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철 거를 주장하는 측은 총독부 건물을 철거함과 동 시에 경복궁을 원형 복원하여 민족의 기상을 바 로 세우자 했고, 이전 보전하자는 측은 건물의 역 사성과 보존가치를 내세워 이전 보전하자는 측이 었다. 물론 양측 모두의 의견이 충분한 타당성을 가졌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철거하기로 결정하 고, 정부는 철거 및 경복궁 복원에 대한 청사진을 발표했다. 부재전시공원에는 총독부 각 부분에서 떼어낸 화강암, 대리석, 초심목 등을 원형으로 두루고 한 가운데 첨탑을 전시하고 있었다. 위원들의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의 이미지를 떠 올렸다. 검투사들의 무대처럼 보였다. 일제의 잔 재를 한가운데 두고 돌이라도 던져야 할 것 같았 다.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차라리 다른 곳으로 이 전하고, 일제 식민지 수탈 현장을 교육하는 공간 으로 활용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픈 역사의 현장도 그 가치를 가진 만큼 보전 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취재=편집위원 이인성, 박묘정, 박정희, 최영아, 밀인사 통신원 김옥임, 장겸임 지인사 통신원 이형자, 벽룡사 통신원 양재범 정리=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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