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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주인들은 부처님의 신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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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6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1-02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기획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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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04:39 조회 2,2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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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주인들은 부처님의 신중이 되었다.

사찰의 작은집 삼성, 칠성, 산신각을 찾아서.... (산신신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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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안의 작은 집, 부처님을 모시는 큰집들은 사찰의 중심에 우뚝 서있고, 아침 저녁 예불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 그곳의 주인들은 뒤로 떨어져 사찰의 한구석에서 부처님을 바라본다. 부처님이 진리에 감화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준 이 땅의 산신, 칠성, 독성들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장으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총지종보는 이분들을 모시고있는 전통사찰의 작은 전각들을 만나보고자 한다. 작은 집이 품고있는 이야기들을 찾아 임진년 한해 독자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산과 함께 성장한 한국의 전통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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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사찰은 대부분이 산을 끼고 조성된 산지형 가람이다. 물론 국토의 70%가 산악 지형이라는 반도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입지조건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이 땅에 처음 전파 될 당시에는 교화와 전교의 목적상 사찰은 사람들 한가운데 위치한다.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에 불교가 들어와 375년에 초문사 - 이불란사가 창건되었고,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이 창건되었다. 백제 역시 왕성의 한가운데 사찰 들이 건립되었다. 공주의 대통사지,부여 정림사지 등은 백제의 궁성과 그 위치를 같이한다. 신라도 초기 불교 전파 후 왕성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된다. 삼국유사에는 경주를 가리켜 ‘사사성장 탑탑안행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있는 듯하다)’이라고 묘사했다. 그 많큼 많은 사찰들이 왕궁의 한가운데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대표적인 사찰이 황룡사다. 지금은 사지만.남아 당시의 웅장했던 사원의 기풍만을 짐작 할 뿐이다. 본격적인 산지 가람의 등장은 통일 신라 후대에 도입된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영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수행을 목적으로사원은 그 구조를 바꾸어 나간다. 억불숭유의 조선 시태를 거치면서 산지 가람은 불법을 이어오는 비장처로서,민중들의 서원을 기원하는 신행의 공간으로 그 맥을 이어 왔다. 요즈음 들어 도심 포교를 위한 현대식 사찰들이 속속 등장하고, 그 규모도 상당히 대형화 되어간다. 그러나 사찰의 기본적인 기능은 수행을 위한 도량으로, 그리고 신행을 위한 공간으로 전통을지켜 오고 있다.



산신신앙과 볼교와의 만남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에는 여지없이 산신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은 인간세상을 다스리다 1908세에 아사달에 몸을 숨기고 산신이 되었다한다. 신라의 박혁거세 또한 선도산 서술성모의 아들이라는 기록과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 역시 가락국의 시조를 낳은 성모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도 전국의 명산을 돌며 산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는 산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개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신성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의 석탈해는 동악(토함산)의 산신이 되었고,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고 전한다. 당대의 영웅들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산신으로 승화되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산천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다. 이로 인해 과도한 재정의 자출을 야기하기도 한다. 산신은 묵가의 길흉을 관장한 것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농사, 기후 건강, 개언적인 소원까지 기원하는 가장친근하고 가까운 존재로 자리한다.

토템신앙에서 기원한 산신신앙과 별을 숭배하는 칠성신앙과 더불어 민중들의 생활 속에 자리한다. 불교에서 정의하는 외도인 산신과 칠성신등이 불교와 습합되어 호법신장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 나타난다. 조선은 성리학을 개국의 이념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건국 초부터 억불시책 단행으로 불교는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 수많은 사찰과 승가는 통폐합되거나 환속 당하였고, 그나마 존속하던 사찰은 양반 관료 사회하에서 끝없는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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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과 호란의 국가적 위기에 승군의 활약으로 잠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지만, 공역과 공납의 부담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불교는 그 명맥을 유지한다. 이는 성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삶의 근본 문제를 불교가 떠안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회의를 느낀 왕비와 궁녀, 고단한 일상사를 벗어나고 끊임없이 복을 갈구하는 민중들의 신앙욕구를 불교가 수용한다. 이 시기는 농촌의 안정과 수공업, 상업의 발전으로 생활이 안정된 서민층이 형성된다. 불교는 세시풍속과 망자에 대한 천도와 같은 신앙적 의례를 사찰에서 행 한다. 1723년 승려 지환이 편찬한 불교의례집 ‘법음집’은 천도의례를 중심으로 편성되어있다. 천도의례를 앞세운 아미타신앙 이외에도 신중신앙, 시왕신앙, 지장신앙등이 부각된다. 승려들의 수행방식도 선 중심에서 선, 교, 염불, 진언 등을 혼합한 회통적 수행이 등장한다. 불교는 각종행사와 다양한 신행 행태를 마련하고 민간의 산신, 칠성, 독성들을 사찰 내로 불러들인다. 마을 어귀에 차려진 소박한 산신당에서의 기도가 사찰 내에서도 가능해지면서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불교에 편입된 산신신앙을 만나게 된다.



호법신중 으로 불법을지키는 산신

전통적인 민간 신앙이었던 산신, 칠성, 독성은 원래는 불교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된 이후 호법신중의 역할을 부여받아 신중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원래 신중은 인도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다. 부처님의 법에 감화되어 호법선신의 역할을 맡았다 전한다. 이러한 신중은 부처님의 설법을 옹호하는 신으로 여러경전에 등장한다.

경전에서 산신의 등장은 당역80권 화엄경에 등장하는 39위 화엄성중에 포함되어 있다. ‘화엄경’ 제1 세주묘엄품에는 석존이 성도를 이루자 수많은 보살과 신중들이 부처를 찬탄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화엄신앙에 비추어 보면 석존의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모든 만물이 더불어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고, 이에 자연의 모든 신들도 불법을 보호하는 신으로 포용되었다. 불교의례서인 안진호 스님의 ‘석문의범’에 나오는 104위 신중에도 산신의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다. 여기서는 104위의 신중 뿐 만이아니라 중국과 한국의 토속신의 이름까지도 나온다.

산신은 신중의 일원으로 당당히 불교 사찰의 한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원래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면 자신들이 믿는 신 이외에는 모든 것을 사탄으로 규정하는 유일신 종교 전파 과정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어느 지역으로 전파되어도 그 지역민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어떠한 신앙도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품어 안음으로 부처님 호법신장으로 도량 안에서 같이 지낸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원융무애의 발현인 것이다.

지금부터 전통 사찰 속에서 신중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 산신과 칠성 그리고 독성들을 만나러 갈까 한다. 부처님이 이 땅에 들어오기 훨신 전부터 함께한 신앙을 살펴보고 신중으로 모셔진 작은 집들을찾아 가보자. (다음호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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