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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명성황후가 복원한 현존 최대의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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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9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4-03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연중기획 산신각 탐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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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종열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공주 신원사=김종열 기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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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6 10:54 조회 1,6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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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명성황후가 복원한 현존 최대의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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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


멀리 백두로부터 내 달린 태백산맥은 한반도의 중앙에서 서 남으로 내려 차령산맥을 이룬다.  차령산맥은 대전, 공주, 논산 을 연결하는 세모꼴의 연봉을 형성하는 데, 이곳이 계룡산이 다. 최고봉의 높이는 해발 845미터로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한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형제봉 등 20여개의 봉우리로 이루어 졌다. 계룡이라는 이름은 능선의 모양이 닭의 머리를 한 용을 닮았다 하여 닭 계(鷄)자에 용 룡(龍)자를 써 계룡산이라 부른 다. 

일찍이 불교의 5불 사상을 근거로 한 ‘신라 5악’ 중의 하나 로 남악인 지리산, 북악인 태백산, 중악인 팔공산, 동악인 토 함산과 더불어 서악으로 계룡산은 위치를 잡았다. 이미 백제 시대부터 계람산, 옹산, 중악 등의 이름으로 당나라에 까지 그 이름을 알렸다. 풍수지리에서는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본다. 

특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계룡산 아래 ‘신도안’을 도읍으 로 정하려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정씨의 도읍지’라 는 도참설과 교통과 뱃길이 불편하다는 도학대사의 조언을 받 아들여 뜻을 접었다 한다. 아직도 왕궁의 초석으로 보이는 105 개의 돌들이 곳곳에 남아 그때 이야기를 증언 해 준다. 

박정희 정권에서도 청와대 이전을 고려 할 정도로 주변 자 연 경관과 풍수적 입지 요건이 완벽한 곳으로 통한다. 지금은 특별한 계획 하에 세워진 군사도시 ‘계룡시’가 자리했다. 이곳 은 육, 해, 공군 본부가 위치하여 우리나라 국방 전략의 요충 지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3군 총장을 비롯한 각군의 장성들이 많아 대낮에 별을 가장 많아 볼 수 있는 ‘별천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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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과 민속신앙의 요람

 

계룡산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당집과 정감록이다. 그 만큼 수많은 민속 신앙의 발원지이다. 

왕조의 흥망과 난세에 대한 예언집인 정감록에도 장차 일어날 도읍으로 기록된 길지 가 바로 계룡산이다. 정감록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가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비결 을 담은 예언서 이다. 특히 ‘감결’이라 불리는 부분을 속칭 ‘정 감록’이라 한다. ‘감결’은 완산백 한룡공의 두 아들 이심(李心) 과 이연(李淵)이 조선 왕조 멸망 후 일어날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의 글 이다. 조선 왕조 이후의 왕족과 도읍을 예언하고 그사이에 일 어나는 재난과 화변에 대한 이야기 이다. 

정감록에 의하면 계룡산은 미래의 도읍지와 환란의 피난지로 예언한다. 정감록에 서 이심(李心)은 “산천의 뭉친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니 정씨 800년의 땅이다.”라고 하여 조선 왕조 500년이 지나면, 계룡산 에 도읍한 정조(鄭朝) 800년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어서 정감(鄭鑑)은 “계룡 개국에 변(卞)씨 재상에 배(裵)씨 장수가 개국원훈이고, 방(房)씨와 우(牛)가가 수족과 같으리라.” 하여 개국의 상황까지를 구체적으로 내다보는 내용도 있다. 이와 같 은 구체적 예언은 ‘감결’의 부록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 記)’에도 “계룡산에 도읍지가 있으니 정씨가 이곳에 나라를 세 운다. 그러나 복덕(福德)은 이씨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밝고 의로운 임금이 많이 나와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 였다. 또한 정감록에서는 온 나라에 큰 12년에 걸친 병화가 일 어날 것이다. 이런 큰 난리를 피하여 살아남을 곳으로 이른바 ‘십승지’라는 것을 열거한다. 그 중의 하나를  계룡산 또는 계 룡산 인근 지역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감록의 도참설은 구한말 어지러운 시대상에 불안 을 느낀 백성들이 믿고 따른다. 이들은 계룡산에 관심을 점차 가지기 시작하더니, 무속 등 전래의 토속 신앙을 비롯한 각종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계룡산 신도안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 난다. 이 중 주류를 이룬 것은 동학(東學)과 정역사상(正易思 想)이었다. 동학계통의  시천교(侍天敎) 교주 김연국(金演局) 이 1912년 신도안을 답사하고 이듬해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그러다가 1920년 교당을 신축하여 이듬해 시천교의 본부를 그 곳으로 옮긴 뒤 각종 신흥종교가 따라 들어오거나, 이곳에서 새로 일어나고 분열되고 하면서 마침내 계룡산은 사교의 요람 으로 자리 잡는다.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수도장으로서 피란 처를 겸하여 들어왔으나 차차 종교적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분파에 분파를 거듭하여 수없는 유사종교의 집단으로 그 세를 불 려나간다. 지금도 이들과의 연관성은 확연히 들어나지는 않지 만 많은 종교 집단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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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와 중악단


계룡산에는 동서남북으로 4대 사찰이 위치한다. 북쪽의 구 룡사, 동쪽의 동학사, 서쪽의 갑사 그리고 남쪽의 신원사이다. 백제 의자왕 11년, 서기 651년 열반종의 개산조인 보덕대사가 창건한 신원사는 수차례 중수를 거쳐 1866년 충청 관찰사 심상 훈이 중건하고 사명을 신원사라 고쳐 불렸다 한다.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대웅전, 향각, 영원전, 대방, 요사채 등이 있다. 대 웅전은 주불로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 80호로 지정되어있다. 향각의 주존은 명성황후가 불사를 하였 다 전하고 특히 조선 후기 무학스님이 지었다는 영원전은 다른 절의 명부전으로 전각의 이름이 특히 하다. 영원전의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상을 모시고 영가천도불공을 주로 하는 전각이다. 이외에도 여래사리탑이라 불리는 오층석탑과 승탑이 현존하고 있다.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의 동편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 에 위치한다. 

계룡산의 산신을 모신 제단이다. 현존하는 산신 각 중에 최대의 규모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과 동시에 북 쪽의 묘향산은 상악,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하고 계룡산 을 계룡단으로 정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마련한다. 1651년 효종 2년에 폐지되었다가 1879년 고종 16년 명성황후의 명으로 재건하고 이름을 중악단이라 고쳐 부른다. 조선 후기 왕실 주도로 건축된 중악단은 완만한 구릉지에 대문간채, 중 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둘레에는 네모난 담장 으로 둘렀다.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궁전 건축 양식 및 수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단묘건축물로서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건물로, 솟을삼문 양쪽에 2칸 씩을 덧붙이고 양쪽 끝에서 뒤쪽으로 2칸씩을 덧붙여 凹형 평 면을 이룬다. 삼문 양쪽에도 작은 2짝 판문을 달아 평상시 드 나들게 하였다. 중문간채 안쪽에는 비교적 넓은 마당 가운데에 신도(神道)를 설치하였다. 대문간채의 중앙 칸 및 중문간채의 중앙 칸 판문에 신장상(神將像)이 그려져 있다. 

본전 중악단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전각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가운데 벽면에 단을 설치하 고 감실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두었다. 각 추녀마루 위에 각각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한 점도 아름답다.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李重夏)가 1891년에 쓴 것이다. 지금은 산악 동호인들을 위해 중악단 오른쪽에 야외 제단이 마련 되어있다. 기자가 취재를 간 당일에도 서울에서 온 산악회에서 시산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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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남매탑의 전설


계룡산에는 호랑이의 보은으로 오누이의 인연을 맺고, 평생 불법을 수행한 두 분 스님의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는 남매탑 (男妹塔)이 있다. 동학사에서 북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 며 오뉘탑, 청량사지쌍탑 이라고도 불린다. 조탑 양식으로 볼 때 백제 말기와 통일 신라 초기의 탑으로 보인다. 

남매탑에 전해오는 전설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패망하자 백제 의 왕족 이였던 한 사람이 계룡산으로 들어와 현재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지 터에서 스님이 되어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생활 을 하고 있었다. 스님은 나라 잃은 설음을 모두 잊고 부처님에 게 귀의하여 수행 정진 중이었다. 눈이 내리던 어느 해 겨울, 스님이 좌선을 하며 삼매에 들어 있는데 밖에서 큰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밖을 나가보니 송아지만한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린 채 고통스러 워하며 시름하고 있었다. 

스님이 가까이 가보니 호랑이가 동물 을 잡아먹다가 갈비뼈가 목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스님은 호랑이에게 "네가 살생한 까닭으로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호랑이 목에 손을 넣어 갈비뼈를 빼 주었는데 호랑이는 연신 고마운 몸짓을 하며 숲 속으로 사라졌 다. 

이후 호랑이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간혹 나타나 산돼지 도 물어다 놓고, 노루도 물어다 놓고 가곤 했다. 스님은 호랑이가 동물들을 물어다 놓자 "내가 그토록 살생 을 하지 말라고 했거늘 또 살생을 했단 말이냐?"하며 호랑이를 크게 호통을 쳐 내쳤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스님이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밖을 나가 주위를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 아리따운 묘령의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머리에 가르마가 단정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갓 시집온 처녀 같았다. 

이 깊은 밤 산중에 묘령의 여인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와 있 단 말인가? 스님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여인을 초암 안으 로 데리고 들어와 정성을 다해 극진한 간호를 했다. 스님은 여 인이 의식이 돌아오자 여인에게 야밤에 이곳에 온 연유를 물 었다. "낭자는 누군데 이 깊은 밤에 산중에 와 계신 것입니까?" 그러자 여인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으며 겁에 질린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스님이 여인을 가까스로 안정시키자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 었다. 

"저는 경상도 상주 땅에 사는 처자이온데, 혼기가 되어 이웃 마을 양반 댁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날 밤에 잠시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송아지만한 호랑이가 앞에 버 티고 있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한 끝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 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바로 이 곳이옵니다." 스님은 여인을 초암에서 며칠 머물게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라고 하였으나 여인은 말하기를 "고향에서는 이미 죽은 목숨 이온데 이 몸으로 어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스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저는 스님을 평생 지아비로 모시겠나이다." 하며 청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스님은 "나는 불제자인데 어찌 여인과 혼인 할 수 있 겠소." 라고 단호히 거절하고, 그대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면 오누이처럼 같이 살아가자고 제안한다.  오누이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비구, 비구니로서 수행을 하다가 한 날 한시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이 두 스님이 열반 에 들자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행적을 후대까지 기리고 자 석탑 2기를 쌓고 남매탑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호랑이의 보은으로 맺어진 인연을 불법으로 승화하여, 평생 도반의 길을 같이 걸었던 두 스님. 지금도 계룡산을 오르는 많 은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전설로 길목을 지키고 있다. 교도 여러분들도 신록의 봄을 맞아 계룡산에 오를 일이 있으면 꼭 한번 들러 참배하시기를 서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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