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에 명운을 걸고 스승의 길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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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9-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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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9-09 15:06 조회 1,351회본문
밀교에 명운을 걸고 스승의 길로 들어서다
밀양 심인당에 출석하면서 대성사는 자신이 본 바와 생각한 바를 세세히 적어 회당 대종사와 깊이 논의하기 시작했다. 난리통이지만 교세가 급격히 팽창하던 때라 스승을 세우는 일과 수행의 교범을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남녀 스승을 ‘정사(正師)’와 ‘전수(傳授)’로 부르는 용어도 당시에 이르러 정해졌다. 교법의 체계 하나하나가 대성사과 회당 대종사의 고민 끝에 정립되기 시작했다. 밀교의 교리 또한 새로운 시선과 해석으로 제자리를 잡아갔다. 대성사의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던 시기였다.
1953년, 전쟁은 거의 끝을 앞두고 있었다. 밀양과 부산 등지에는 흥남 철수 때 피난 온 이들이 많았는데, 그들도 빠른 시일 내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는 듯 피난지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현실의 불안정함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적 고민을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절과 교회를 찾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새로운 종교적 움직임도 생겼다. 생존의 문제만큼 불합리한 현세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이들도 늘어난 것이다.
그해 4월 대성사는 경상남도 밀양읍의 지방주사로 승진했다. 전쟁 초기에 밀양공립농림중학교는 6년제에서 3년제 고등학교로 바뀌었고 대성사는 고등학교 교육공무원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그 와중에도 밀양 심인당에 나가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대성사도 유한한 삶과 생명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우리는 두 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즉 육체적인 생명과 정신적인 생명이다. 육체의 생명은 생로병사를 받아야 하는 무상한 생명이고 정신적인 생명은 상락아정의 열반체
인 영원한 생명이다. 세상은 이 정신적인 생명체를 모르고 육체적인 생명만 소중하게 생각하고 죄업을 지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적인 생명을 소중히 가꾸어야 할 것이
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 진리를 향해 나간다는 것,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정신적인 생명이며, 정신과 육체 또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정신이 건전해야만 육체도 건전한 것이다.”
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의 결과는 결국 믿음을 가지고 건전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한다. 특히 종교의 비밀한 면을 이렇게 강조했다.
“어느 종교에도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다. 수행의 깊이에 따라 그 비법을 닦아 익히거나 자신의 것으로 깨달아 얻게 하는 것이 근본이다. 다른 종교보다 불교에 그 비밀스
러운 법이 많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밀교이다.”
이것은 불교 경전을 살피고 수행한 끝에 대성사가 얻은 지견이다. 이 때문에 불교의 어떤 가르침보다 밀교의 내용이 시대와 맞다고 여겼다.
밀양 심인당에서 대성사가 차지하는 비중도 점차 커졌다. 대성사에게 종교적 질문뿐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묻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들을 대하며 수행을 통해 마음과 육체가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새로운 인연의 시간이 닥쳤다는 것을 실감했다.
1953년 8월 24일, 심인불교건국참회원(心印佛敎建國懺悔園)은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종단 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제헌 총회를 열었다. 대구 남산동 심인당에서 열린 이 회의에 대성사는 교도 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전국의 스승을 대표해서 정사와 전수 23명, 그리고 교도 대표 50명이 모여 종단의 미래를 도모한 회의였다.
회의를 통해 심인불교건국참회원이란 간판은 ‘대한불교진각종 심인불교 보살회(大韓佛敎眞覺宗 心印佛敎 菩薩會)’로 바뀐다. 종단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인회(印會)가 구성되고 회당 대종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종단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대성사의 조언과 함께 중지를 모아 계율에 해당하는 인법(印法)이 제정되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게 된다.
심인불교(心印佛敎)의 심인이란 불심인(佛心印)을 말하며, 마음속의 부처이다. 진리는 불심인의 진리를 뜻한다고 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심인이야말로 본심(本心)이며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이니 일체 인과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 심인불교의 종지이다.
종회와 종법과 수행체계가 갖춰지면서 진각종은 큰 도약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풍이 불면 역풍도 함께 찾아오는 것이 피할 길 없는 세상 이치이다. 순조로울 것 같던 출발은 인간적인 반발과 저항도 겪었다. 참회원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었고, 인법을 내세워 사람을 재단하는 감정적인 반발도 일어났다. 결국 세상의 이목을 끈 사건이 터졌다. 원망과 대립은 법적인 문제로 비화돼 소위 ‘심인불교 사건’이 벌어졌다. 회당 대종사의 구속까지 이어진 사건은 결국 창종 과정에서 빚어진 인간적인 대립과 금전 문제가 화근이 된 것이다.
결국 이듬해인 1954년 포항과 울산 등지의 참회원과 교도 일부가 떨어져 나가 ‘대한불교진언종참회당교도회 유지재단법인(大韓佛敎眞言宗懺悔堂敎徒會 維持財團法人)’을 결성한다. 또 하나의 밀교종단인 진언종(眞言宗)이 가지를 쳐 나갔다. 한국 밀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자 대성사는 오래도록 몸담았던 천직에서 물러났다. 1953년 9월 30일 사직원을 내고 교직과 공직 생활을 접은 것이다. 개인적인 아쉬움과 안정적인 길을 떨치고 시대가 요구하는 미지의 길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2일 정사 후보로 임용되어 막 문을 연 서울심인당에서 교화에 나선다. 서울심인당은 지방의 터전을 서울로 옮기기 위해 종단의 명운을 걸고 있던 곳이라 그 중요성이 높은 곳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대성사는 스승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스승이란 말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다. 시취(試取) 스승, 정사보(正師補)를 거쳐서 대성사는 1955년 4월 13일 정사로 승진하였다. 당시 대성사의 법호는 시당(施堂)으로 시당 정사라 불리었다. 갓 출범한 신생 종단이 분규에 휩싸이고 법정 다툼이 벌어지면서 세상의 의혹이 모였을 때다. 누구라도 이 불편한 현실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대성사는 마음 깊이 깨닫고 있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기보다 새 종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승보살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생생하게 인생의 고락을 겪으면서 고난을 통해 마땅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오상성신(五相成身), 즉 보리심을 통달하고 보리심을 지키며 금강심을 이루고 그 금강심을 키워 불신원만의 단계를 모두 수행하여 온전히 부처가 되리라는 물러서지 않는 각오로 정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스승의 길을 걷는 대성사의 각오였다. 사람과 재산에 얽힌 종단의 분란을 지켜보며 스승과 교인과의 관계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느낀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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