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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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86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1-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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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02 09:05 조회 3,013회본문
한국의 석탑
탑이란 말은 원래 탑파인데 이를 약하여 보통 탑이라고 부른다. 또한 부처님과 관련시켜 불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탑파의 어원은 고대 인도어인 범어의 스투파와 팔리어의 츄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인도 말을 한자로 옮기면서 여러 가지로 썼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익숙하고 대표적인 단어가 탑파인 것이다. 결국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자 스투파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뜻보다는 음을 빌려 탑파라 한 것이다. 즉 스투파는 졸도파, 도파, 소도파 등이라 쓰였고 ‘츄파’는 유파, 두파, 탑파, 탑이라 쓰였던 것이다. 스투파의 의미로 보아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방분, 원총, 고현처라 부른다.
이 ‘스투파’라는 말은 철학서인 베다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베다는 네 종류로 되어 있는데, 이들 책 중 가장 오래된 리그베다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스투파’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서기전 15세기경 석가모니 이전부터 이미 쓰여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스투파’라는 말은 ‘혼의 퇴적’ 응고, 응집, 건립, 적중과 같은 의미이고, ‘스투파’는 묘의 뜻을 갖는 영어의 툼브와 관계가 있는 말로 아소카왕의 비문에도 츄브라고 되어 있다. 또한 불교대사전에서는 부다의 한자식 표현인, 부도, 포도, 불도 역시 탑이라는 말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스리랑카에서는 사리봉안의 장소로서 탑을 다가바라고 부르며, 미얀마에서는 영어와 같이 파고다라고 부른다.
이 말은 포르투갈인들이 만든 말로 알려져 있는데 포르투갈어 ‘파고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5세기 이후 신대륙 발견을 위하여 동양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던 포르투갈이 동남아시 아 지역에 진출하여 독특한 건축물인 탑을 보고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느 이 때문에 지금도 서양인들은 동양의 탑을 지칭 할 때 ‘파고다’ 라고 부른다. 그러나 흔히 가늘고 긴 고층건물을 탑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해서 이는 타워이지 ‘파고다’ 는 아닌 것이다.
2. 한국석탑의 발생
한국의 사원형 석탑은 언제부터,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졌을까? 즉 불교 도입 시기와 같은 시기인가? 그 재료는 무엇인가? 그 형태는 어떠하였는가? 또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실증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뚜렷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주변 상황으로 미루어 추정할 뿐이다.
한국의 석탑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고 가람조 성이 개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당시의 당탑가람이 대부분 목조였던 관계로 오늘날 그 유구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불교가 한국에 전래된 4세기 말 중국의 육조문화에 이어 수, 당을 통한 문물교류가 밀접하였다는 사실과 당시의 중국탑 형식의 본류가 목조루 각형탑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한국탑의 초기형식은 고층누각형식의 목조탑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결국 대체로 중국에서의 초기 건탑시기를 2〜3세기로 보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불교전래시기인 4 세기 후반은 곧 중국식 탑파양식이 그대로 전수되 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시기에 속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삼국유사 등에 그 당시의 탑상을 설화형식으로 전할 뿐 이다. 이러한 전설적인 기록으로서는 요동성육왕탑 에 대한 기록을 비롯하여 평양 대보산하의 고려 영탑사와 금관성 파사석탑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요동성육왕탑의 전래 사실은 곧 방유토탑삼중, 상여복부, 기목탑칠중 등에 의하여 3 층의 토탑과 7층의 목조탑이 존재하였고 이 가운데 토탑은 위에 솥, 즉 발을 덮은 것 같다 하여 바로 인도탑의 형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영역에서 다각다층석탑이 건립되는데 영탑사 8각 7층 석탑이 이들 석탑의 조형이 아닌가 짐작된다.
3. 석탑의 종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서역으로부터 인도에 이르는 여러 나라에 이탑, 전탑, 석탑, 목탑, 칠보탑,금동탑이 있으며 경전에는 이 밖에도 분탑, 우분탑, 사탑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가 전파된 지역에 서 탑파의 재료에 대한 제한은 없고 어떠한 재료에 의하든지 복덕은 같으며 더욱이 목조탑의 비영구성과 전재의 비생산적인 점을 고려할 때 가장 영구적 이며 보다 능률적인 석재로 조탑함이 당연하였을 것이다.
삼산신삼은(조선의 석탑)이란 그의 저술에서 한국탑을 구분함에 있어 다층탑의 형태라하여 일반형, 일반변형형, 팔각형, 원형, 유탑신좌형, 모전형, 사사자형, 점판암탑, 마애석탑, 특수형으로 분류하였다.
한국탑파의 형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다. 재료에 의한 분류, 형태에 의한 분류, 발전양식에 의한 분류, 시대구분에 의한 분류, 형식과 지역성에 의한 분류, 평면형태에 의한 분류, 기단형식에 의한 분류, 층수에 의한 분류 등이 가능하다.
4. 석탑의 시원양식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시기로, 오랜 목탑의 조성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 목탑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의 다층으로 건립 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현재 남아 있는 평양 청암리사지에서 8각전의 8각탑파 와 대동 상오리사지에서 8각당의 기단부가 조사 되어 고구려 목탑지로 추정된바 있다. 백제의 유구로는 부여 군수리사지와 익산 제석사지에서 방형의 목탑 기단부가 확인되었다. 신라의 유지로는 경주 황룡사지에 거대한 방형 9층목탑지, 사천왕사지의 목탑지, 망덕사지의 목탑지, 보문 사지의 목탑지, 기림사의 목탑지가 남아 있다.
목탑의 유행에 이어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에서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석탑이 백 제에서 비롯된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추 측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이 발달하였던 나라로 이미 ‘사탑심다’ 의 나라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또 신라의 황룡 사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가 초빙되어 공사를 담당하였으며, 일본의 초기사원 창립에 백제의 와전사 등이 건너가 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미륵사지석탑은 현재까지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이 탑을 한국석탑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그 양식이 목탑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이 탑은 당시 유행되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구현한 것으로, 특히 기단부는 목탑에서와 같이 낮고 작다. 또 탑신부의 중심에 거대한 방형석주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석탑의 찰주로서 이러한 방주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의 형식과 같은 점이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를 표시한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전통 목조건축에서만 보이는 평방과 창방을 가설하 였으며, 다시 요당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있어 옥개석을 받고 있다. 이것 또한 목조건물의 가구를 본받고 있는 것이다. 즉, 목조가구의 세부까지도 석재로 충실히 모방한 한국 최초의 석탑으로서, 백제에서 석탑이 발생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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