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귀명(歸命)함은 정신적 생명 부처님께 맡긴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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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10-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10-10 15:15 조회 1,305회본문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1절 밀교란 무엇인가
2. 정통밀교는 조직과 체계를 갖춘다.
(앞 호에 이어) 밀교신앙(密敎信仰)은 한가지로 전일(專一)해야하고, 삼보(三寶) 즉 불(佛)과 아사리(阿闍梨)를 비방하여서는 아니 된다.
밀교의 신앙은 대체로 대일신앙(大日信仰), 관음신앙(觀音信仰), 약사신앙(藥師信仰), 지장신앙(地藏信仰) 등으로 분류(分類)되는데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選擇)해야 된다. 그러므로 밀교에 입문하여 어느 정도 수행이 궤도에 오르면 결연관정(結緣灌頂)이라는 의식(儀式)으로 자기신앙대상(自己信仰對象)인 불보살(佛菩薩)과 인연을 맺는 것이다.
밀교의 전달(傳達)은 자격(資格)이 있는 아사리(阿闍梨)가 면면상대(面面相對)하여 정식으로 수여(授與)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규정(規定)하고 있다. 또 옳은 삼밀과 옳은 의궤의 밀교를 선택하여 믿어야 함은 물론이다. 즉 교법의 우열(優劣)을 알고 가려서 믿어야 하며 법신불과 제불보살의 만다라를 믿고 결여한 자기본존(自己本尊)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지 인간을 상대로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승과 교도는 인간인 이상 때로는 과오(過誤)도 있고 의견대립도 있다. 그러다가 그것이 감정이나 증오(憎惡)로 변하여 신앙과 혼동하고 관련지어서 불과 법을 비방하고 화(禍)를 입게 되기 때문에 믿음과 시비(是非), 또는 본존과 인간을 혼동하지 말고 별개(別個)로 해결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간혹 스승과 마음이 틀이고 교도기리 감정으로 숭고(崇高)한 자기신앙을 그만 버리고 퇴전(退轉)하는 사례(事例)를 흔히 볼 수 있고, 또 일방적인 말만 듣고 지금까지 닦아온 공덕(功德)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을 흔히 본다. 자기의 신앙이 상대자의 시비에 따라 좌우되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곧 자기의 운명(運命)과 이해(利害)를 상대자에게 맡기는 것이 된다. 즉 상대방에게 이미 패배(敗北)했다는 것이 된다. 상대방이 옳으면 내가 공연(空然)히 과오를 범(犯)하게 되는 것이고 상대방의 잘못이라도 그로 인(因)해 내가 희생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생명이란 하나뿐인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두 개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즉 육체적(肉體的)인 생명(生命)과 정신적(精神的)인 생명이다. 육체적인 생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받아야 하는 무상(無常)한 생명이고 정신적인 생명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체(涅槃體)인 영원한 생명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정신적인 생명체를 모르고 육체적인 생명만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든 죄업(罪業)을 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신적인 생명을 소중하게 지니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신앙이 곧 정신적인 생명이고 정신이 건전(健全)할 때 육체도 건전하다. 모든 행복과 해탈의 근본이 이 청정(淸淨)한 자성(自性)에서 울어나는데 우리는 그것을 망각(忘却)하고 양심을 흐르게 하고 신의(信義)를 저버리고 도덕(道德)을 어기며 사리(私利)만을 추구(追求)하여 공익(公益)을 해친다.
국가와 사회가 있어야 내가 생존(生存)하지 않는가, 한쪽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지구도 공전(公轉)하면서 자전(自轉)하지 않는가, 불에 귀명(歸命)한다는 것은 이 정신적인 생명을 부처님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믿음은 도의 근원이자 공덕의 어머니라 했다. 불자의 신앙은 창조신 내지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삼보를 향한다. 진리의 길을 몸소 걷고, 열어서 보여 주셨으며, 그 길로 중생을 이끌어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연기, 인과, 윤회의 부처님 가르침,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뭇 수행자에게 귀의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스스로를 중심축으로 삼아 자전하듯 불법승 삼보를 믿고 의지하되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수행 정진해야 한다. 우리 마음 안에 본래 자리한 자성으로 돌아가고자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밀교에서는 수행의 바탕을 어느 정도 닦은 후 불보살님 가운데 한 분을 따로 신앙대상으로 모신다. 평생을 우러러 받들어 공양하고 따라 배울 자기본존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는 이마에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리게 한다. 자기본존을 가슴에 모신다면 우리의 믿음과 서원은 훨씬 굳세질 것이다.
스승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지금 현존하는 스승을 만나 공양하고 배우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때 티베트 불교를 라마불교라고 부른 것도 철저히 스승을 중심으로 부처님법이 전승되어온 전통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로 정법이 이어지는 사자상승의 전통은 이심전심, 염화미소의 선맥에서부터 강맥, 계맥, 율맥으로 이어져왔다. 선종의 여러 선문답 일화는 마음법이 어떤 과정에서 인가되고 전수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상좌제도도 비슷하다. 은사스님으로부터 수행가풍을 배우고 그 경지와 수행 면면을 잇는다. 출가상좌 뿐 아니라 재가불자들 가운데에도 스승의 큰 뜻에 믿음을 내고 공양하고 널리 전파하는 유발상좌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밀교에서는 사자상승의 정법 전승을 더욱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있다. 스승과 제자로서 정식으로 인연을 맺는 관정의식을 통해 제자로서의 자격을 인가하고 스승으로부터 법을 전승받는다.
수행은, 스승이 도의 뿌리임을 바르게 알고 그에 의지하여 정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리의 스승이자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래스승으로 모시고, 제불보살님 가운데 한 분을 자기본존으로 모시는 데다, 현세에서 근본스승까지 둔다면 수행의 진전은 훨씬 빠를 것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현세의 근본스승을 더해 사보로 모시고 네 번 절을 올리며, 현세의 스승을 ‘부처님처럼’ 모시는 데 머물지 않고 ‘부처님으로’ 모신다고 하니 스승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세상일이 그렇듯 스승과 제자의 인연도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덕과 지혜를 두루 갖춘 스승이 있어야 하겠지만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제대로 받들어 모실 제자의 존재도 중요하다. 스승에게도 많은 덕목이 필요하겠지만 제자 역시 공부하겠다는 의지는 간절한지, 안목은 갖추었는지, 스승을 믿고 가르침을 그대로 행할 준비는 되어있는지, 갖춰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흔히 본받을만한 어른이 없다고 말한다. 성철스님, 법정스님 같은 훌륭한 스승이 더 이상 안 계시는 것 같다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눈이 어두운 것은 아닐까? 제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주어도 자만에 빠져 들어오지 않는 건 아닌가? 아니, 진정으로 스승을 부처님처럼, 혹은 부처님으로 모시려는 마음을 낸 적은 있는지 돌아본다.
제자가 갖춰야 할 자격을 『대일경』에서는 이렇게 제시했다. “중생 가운데 근기가 뛰어나며, 죄나 과실을 여의고, 이해력이 뛰어나며, 부지런히 노력하고, 깊은 신심을 지니며, 언제나 남을 위하여 기쁘게 힘쓰는 자라야 한다.”
학생도 공부를 해야 궁금한 게 생긴다. 직접 공부하고 수행하다보면 어느 순간 막히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지고, 간절히 묻고 싶은 의문도 품게 된다. 그럴 때 스승의 가르침이 눈을 틔우고 가슴을 파고 드는 법이다. 바른 제자가 되기 위해 곁에 계시는 스승께 여쭤보자. “저는 지금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윤금선 (BBS 「무명을 밝히고」 「거룩한 만남」 구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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