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념처 (5) 관사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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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76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4-07-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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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4 13:20 조회 3,032회본문
법념처 (5) 관사성제
법념처 수행의 5가지 방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관오개, 관오온, 관십이 처, 관칠각지 그리고 관사성제이다. 사성제는 삼법인과 함께 불교의 중심교리 이며 법념처 수행의 가장 중요한부분이다.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다섯 비구들을 상대로 처음으로 설법하신 것도 이 사성제이다. ‘제’라는 것은 진리라는 뜻인데 사성제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다.
사성제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의 네 가지로서 간략히 ‘사 제’라고도 한다.
고성제는 인생은 고해와 같은 것으로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의 존재의 본질이 고 라고 보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고, 늙는것도 고, 병드는 것도 고, 죽음도 고이며 미 워하면서도 만나야 하는 것[원증회고], 좋가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것[애 별리고], 가지고 싶은데 가지지 못하는 것【패주코꼬], 오온으로 이루어진 이 몸 자체가 고[오취온고]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 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고성제이다.
집성제는 고의 원인을 밝히는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모든 괴로움은 갈애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갈애라고 하는 것은 목이 말라괴로워하는 것처럼 집착하고 갈구하는 것이다. 뭍에 올라온 고기가 물이 없어 헐떡이는 모습을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 다. 인간들도 이와 같이 재물, 이성, 권력 등에 탐착하면서 이를 가지지 못해 괴로워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갈애가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중생으로하여금 끊 임없이 육도를 윤회하면서 생사의 괴로움을 되풀이하게 하는 것으로본다.
멸성제라는 것은 세간의 모든 괴로움을 끊을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청정하고 지 혜로운 마음가짐으로 괴로움의 실상을 잘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열반 에 이르게 된다.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그러한 경지를 열반 이라 한다. 갈애가 완전히 식어버리고 번뇌가 다한 것이 멸성제에서 말하는 경지이다.
도성제는 멸성제에이르는 방법을 설한 것이다. 거기에는 바른 견해[정견, 바른 생각], 바른 언에정에, 바른 행위[정업], 바른 직업[정명], 바른 정진[정정진], 바르 게 생각을 놓치지 않는 것[정념], 바른 선정[정정]의 8가지가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중도라고 한다. 생각과 행동에서 양 극단을 피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의 극단이 있으니 감관의 느낌을 통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는 저급하고 무익한 범부의 길이다. 또하나의 극단이 있으니 자기를 학대하는 고 행을 통하여 도에 이르려고 하는 것으로 이는 괴로움이며 가치가 없고 무익한 일이다.”
도성제의 내용인 팔정도는 이러한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길을 택하여 영원한 안락 에 이르는8가지 방법이다.
《대념처경》에서 사념처를 언급한 곳에서 부처님께서는이렇게 이르셨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법에 안주하고 사성제에 의지하여 제법을 관찰하는가? 비구들이예 이와 같이 여실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고라고 여실히 알아야 한 다. 이것은 고의 원인이라고 여실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고의 멸이라고 여실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실히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사성제를 바르게 깨닫는 방법은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여실요지)는 것을 일러주신 것이다. ‘여실’의 의미는 글자그대로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 이다. 고가 어떤 것이며 고의 원인은 무엇이고 고가 멸한 상태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고를 멸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중생들은 자기에게 괴로움이 닥쳐올 때는 그 괴로움을 세상의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 크게 느끼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한 쾌락 추구가 또 다른 괴로움의 씨앗이 되는지를 모르는 채.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인 팔정도에 대한 이해도 쉽지 않다. 중도의 입장에 선 정견이나 정사유가 어떤 것 인지를 바르게 알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여실히 바르게 알라고 하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성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의 관찰과 이해는 불교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궁 극적인 것이다.
사성제의 관법
사성제를 관함에 있어 먼저 고성제를 살펴보자.
《대념처경》에서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태어남이 괴로움이고 늙음이 괴로움이며 죽는 것이 괴로움이다. 수 - 비 - 고 - 우 - 뇌가 괴로움이며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 는 것[원증회고]이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애별리고]이 괴로 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구부득고]이 괴로움이니 밀하자면 오온으 로 이루어진 이 몸자체[오취온]가괴로움이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생. 노. 병. 사와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를 팔고라고 한다. 우리의 일생은이러한 팔고로써 점철되어 있다. 말하자면 몸뚱이를 지 니고 이 세상에 온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씀이다.
불교에서는또한 고를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고고, 괴고, 행고가 그것이다.
먼저 고고란 육체적, 감각적인 고로서 아프고 따갑고 차고뜨거운 통증 등을 말한 다. 외부의 충격이나 병에 의하여 유발되는 우리의 육체가 있는 한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러한 고가 고고이다.
괴고는 어떤 상태가 파괴되어 변화되는 경우에 느끼는 정신적 고이다. 즉 즐거운 상 태가 소실될 때 느껴지는 괴로움으로서 어떤 욕망이나 기대에 반하여 그것이 소멸되 거나 충족되지 못할 때에 괴고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청춘을 자랑하다가 노쇠하 거나 재산이 줄어들거나 명예가 추락할 경우 등에 느끼게 되는 고이다. 이러한 고는 오직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고로서 주관적인 면이 상당히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는 그러한 상태가 육체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보다도 정신적인 박탈감과 상실감이 더 크게 작용하여 고로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러한 고는 욕망과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오는 것으로서 그러한 욕망과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충족하 지 못했을 때는 더 큰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행고는 일체의 현상세계가 고라는 것이다. 제행무상에 따르는 끊임없는 변화로 인하여 안정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괴로움이다. 고고나 괴고는 그러한 괴로움의 상태가 사라지거나 극복되면 낙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임에 반하여 행고는 우리가 삼계육도를 윤회하게 되는 한 느끼게 되는 근원적인 고를 말 한다. 일체개고라는 것도 바로 이 행고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현상계에 대하여 우리는 느끼지만 낙도 느끼며 고도 낙도 아닌 불고불락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는 어째서 일체의 현상계가 모두 고라고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생들의 삶 자체를 고로 보는 것은 불교만의 사상은 아니었다. 삶 자체를 고의 연 속이라고 보는 것은 인도사상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제외한 다른 인도 사상에서는 인간계를 벗어나 천계에 이르면 괴로움은 없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반 하여 불교에서는 인간이 어디에 태어나든 무명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고가 계속되는 것으로 본다. 무명의 바탕이 되는 우리의 업이 소멸하지 않는 한 고는 계속 된다. 바라문교에서는 우주의 근본진리인 브라만과 개인원리인 아트만이 합치함으로 써 고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불교에서는 ‘아’라는 것을 주장하는 한은 집착에서 벗어날수 없기 때문에 고도또한 없어질 수 없다고보았다.
불교에서도 업보에 의하여 윤회하는 범부에게 있어 무상하게 변하는 현상계는 진정 한 낙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인생 자체를 고로 보았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일시 적인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여도 무상함 속에서 그 즐거움은 끝이 나고 즐거움이 끝날 때의 괴로움은 더 크기 때문이다.
진정한 낙은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미혹을 끊고 윤회를 벗어나 열반의 상태에 이르 렀을 때에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중생이 미혹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은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미혹한 중생은 삼계육도 어디를 가나 고가 따르게 되 어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우리가 무명에 머무르고 있는 한 일체의 현상계는 모두 고라 고 본다. 윤회 전생하는 범부에게 있어 쾌락과 행복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쾌락과 행복을 상실했을 경우에는 그 괴로움이 상대적으로 더 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따라서 일체개고란 깨닫지 못한 범부에게 있어서 그러한 것이 며, 깨달음을 얻은 성자에게는 일체는 고가 아니다. ‘오온은 고이다.’라고 하는 것도 깨 닫지 못한 범부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범부에게 있어 오온은 일체이기 때문 이다.
불교에서 이처럼 일체 현상을 고로 보기 때문에 다른 종교가나 사상가들은 불교를 염세적 우 비관적 종교로 보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어쩐지 불교라고 하면 염세적 이거나 세속을 완전히 버린 사람만이 택하는 종교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비판했던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은 불교의 깊은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불교관에 기준을 두고는 불교를 비판했 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점에서 불교가 세상을 멀리하고 가족을 버리기 때문에 반인륜 적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불교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으로서 불교의 이상인 열반적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원래 종교는 현실의 고통을 제거하고 영원의 안락을 구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현실 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 있어야만 그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불교가 다른 종교나 사상과 대비되는 것은 이러한 철저한 현실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성제를 관함에 있어 고의 실체를 여실히 바라보고 우리의 삶 자체가 괴론움의 연 속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면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도 제대로 알게 된다. 병을 앓고 있어도 그것이 병인지도 모르면 병을고칠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고 병을 고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 문에 괴로움의 상태를 여실히 알기만 하여도 열반의 길에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성제라고 이름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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