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종 초대 사감으로 현대 밀교의 앞날에 나침반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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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10-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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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10-10 15:21 조회 1,282회본문
진각종 초대 사감으로 현대 밀교의 앞날에 나침반이 되다
“청렴정직하고 스승을 잘 받들어 행하면 다른 자격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교화는 잘 될 것이다. 종단은 민주주의나 어떠한 법조문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을 따라 스승과 제자, 수행을 이끄는 이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모범을 세워야 크게 일어설 수 있다.
헌신적인 책임과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고 남의 과실을 지적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여 화합하고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나 자신이 스승과 윗사람을 경멸하고 맞서 다툰다면 어찌 아랫사람과 교도들이 나의 뜻에 따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스승의 도리에 대해 깊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으로 줄곧 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흔들리는 교단을 안정시키는 데 전력을 다한 끝에 세상 의혹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신흥종교의 비리 의혹사건으로 알려졌던 심인불교 사건은 결국 오랜 수사와 재판 끝에 회당 대종사의 무죄로 판결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새 종단에 대한 세상의 기대도 커졌다.
1956년 4월 2일, 경북애국단체 연합회에서는 진각종의 실체를 파악하고 자신들의 대중 활동에 대한 참여를 요청했다. 진각종에서 두 분의 원로 스승과 함께 대성사가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대성사의 종단 내 입지가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대외적인 활동을 맡기 위해서는 위상에 걸맞는 인물이 나서야 했다. 새로운 종단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인품과 경험이 필요한 점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더욱이 사회 활동의 경험이 풍부한 인물을 골라야 했는데, 대성사는 진각종을 대표하기에 충분한 인격과 종교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대성사의 국가관은 항일운동과 망명생활,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다른 애국정신이 심지가 되어 있으므로 전후 사회의 안녕을 돕기 위해 종교인으로 해야 할 바를 다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성사는 종교인으로 정치에 몰입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애국과 중생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소승적 자아를 넘어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수행관이 민주주의와 통한다고 믿었다.
“정치와 종교는 마치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도 같다. 국법에는 죄는 벌주고 종교는 착한 일을 권해 선행은 선한 과보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알게 되면 악행을 두려워하고 스스로 선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치와 종교 모두 선으로 이끌어 간다. 그 관계는 음양의 원리가 서로 겉과 안으로 함께 맞물려 돌아가 일마다 공이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도의심道義心을 크게 일으켜 국민을 더불어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중추 역할을 하게 되는 것도 또한 종교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국가는 정치로서 그 자유를 주는 것이고 종교는 사람들의 양심을 스스로 이끌어야 진정한 자유민주정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이치로 보아 크게 보더라도 종교는 자유세계를 정신적으로 묶어가니 마음으로부터 전 세계가 하나 같이 되는 것이다. 나라마다 국민정신과 민족사상은 비록 다를지나 오직 신앙하는 종교적 이념만은 공통적이다. 생활풍속은 각각 다르지마는 신앙생활과 윤리감은 같은 까닭이다.”
모든 송사가 마무리되면서 진각종은 다시 재정비의 시간을 갖게 된다. 회당 대종사는 1956년 10월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포교 전법에 나섰다. 종단 전체의 일이 분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할 일은 많으나 경륜은 부족한 때에 대성사의 경험이 빛을 더했던 시기이다.
진각종은 초기부터 밖으로 교육사업과 사회구제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전쟁 후의 혼란 속에 종교가 해야만 하는 꼭 필요한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부적으로 행정 체계를 만들고 교학을 세우는 일도 시급했다. 이런 안팎의 일들에 대성사의 힘이 필요했는데, 오랜 공직과 교육 현장의 경험은 진각종의 진로에 큰 역량이 되었다.
서울로 종단의 기반을 옮긴 후 1956년 대성사는 회당 대종사가 주석하던 서울 왕십리 심인당의 스승으로 봉직하게 된다. 현재 밀각 심인당인 왕십리 교당은 진각종의 서울 진출의 기반이 된 곳이다. 진각종은 초창기 각종 업무를 정비하고 규정을 만들며 일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해 재단 회칙으로 사감(査監)이란 직책을 만들게 된다. 종단 전체를 살피고 감사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자리였다.
1956년 12월 11일 대성사는 진각종 초대 사감의 직책을 맡는다. 평생 공적인 일에 사사로운 마음을 내지 않고 정대하게 처리했던 성품에 꼭 맞는 직위이며 종단이 앞으로 바르게 나갈 나침반의 역할이었다. 사감 직책은 후일 감사 기관인 사감원(査監院)으로 확대된다. 초기 종단에 꼭 필요했던 사정 업무의 기틀을 잡는 것이 대성사의 소임이었다. 개인의 수행뿐 아니라 종단 전체의 살림과 계율 등을 살펴야 했고, 대성사는 제기된 불평과 불만을 공명하게 처리하여 어떤 결정을 내려도 종도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대성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잘못이 있으며, 그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참회라고 하였다. 그것이 참회원으로 출발한 종단의 취지에도 맞는다고 가르쳤다. 중요한 것은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참회하고 자기 행을 바로 잡는 것이라며 그 원칙을 종단의 사감 업무에 그대로 적용해갔다.
“선악의 판단은 결코 전통적인 교육의 결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의식 속에 판단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은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참회하는 마음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것이며 인간만의 고유한 성질이다. 금수禽獸는 참회하는 눈물이 없다.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만 있는 자는 배운 지식을 악용하여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 든다. 거짓으로 선善을 가장하여 위선으로 진실을 감춘다. 그러므로 인간이 먼저 된 후에 지식을 가져야 그 지식으로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이라면 무엇을 먼저 가져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사감의 역할로서뿐 아니라 스승과 교도들의 잘못된 일과 실수를 대하는 대성사의 가르침은 초기 종단의 불협화음을 바로잡는 데 큰 힘이 됐다. 종단이 외형적인 틀을 잡아가면서 내면적인 골수를 바로 세울 필요가 생겼다.
진각종 70년사 중 1956년 11월 3일 ‘애국단체연석회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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