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사념처 수행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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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88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5-07-07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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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18 13:05 조회 3,138회본문
미얀마 사념처 수행의 핵심
미얀마 사념처 수행의 핵심은 크게 나누어 이 름붙이기와 주시, 알아차림, 의도의 파악이라고 할수있다.
이름붙이기는 마하시 센터 수행법의 특징이라 고도 할 수 있는데 특히 사념처 수행을 처음 시작 하는 초심자에게는 유용한 방법이다. 복부의 주 시에서 보는 것처럼 복부가 일어나면 ‘일어남’이 라고 이름 붙이고 꺼지면 ‘꺼짐’ 혹은 ‘들어감’이라 고 이름 붙인다. 몸의 어느 부분이 가려우면 ‘가려 움’이라고 이름 붙이고 아프면 ‘아픔’이라고 이름 붙이며 주시와 관찰이 예민해짐에 따라 더 구체 적인 이름을 붙여도 된다. 이름 붙이기는 사념처 전부에도 해당하며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시하고 자 하는 대상에 마음을 더 잘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면 주시하고자 하는 대상을 좀 더 객관화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 붙이 기에만 마음을 쓰다보면 오히려 대상의 주시가 소홀해 질 수 있다. 또한 어떤 현상들에 대 해서는 이름 붙이기가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는 이러한 경우가 더 많다.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 수행자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현 상 그 자체를 주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 붙이기는 초심자의 주시를 돕기 위 한 것으로서 수행이 진전되면서 자연히 그 필요성이 감퇴된다.
다음으로 미얀가 위빠싸나 수행에서 강조하는 것은주시이다. 주시는 사띠라고하는데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알아차림 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알아차림에 해당되는 말은 삼빠자나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사띠는 수행자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마치 어항 속의 금붕어가 노는 것을 바라 보듯이 바라보는 것이다. 호흡의 흐름에 따른 복 부의 일어나고 꺼짐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몸에 나타나는 통증이나 가려움, 심지어는 잡념이 일 어나는 것까지 고요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이 사띠이다.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현 상들에 대하여 우선은 가장 현저한 느낌이나 변 화에 주목하면서 주시를 하되 그러한 현상들이 누그러지면 다시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미얀마의 사념처 수행이다.
사띠의 과정에는 다만 현상에 대한 주시만 있 을 뿐이며 ‘나’라는 것은 배제된다. 이름 붙이기를 할때에도‘나의 등이 가렵다’라든지. ‘나의 엉덩이 가 아프다’등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등이 라는 부위와 아프다, 혹은 가렵다라는 현상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현상과 그것을 주시하는 마음만이 있을 뿐이 다. 망상이 일어날 때에도 그것을 편견없이 고요 히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망상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든가 망상의 원 인을 생각하거나 할 필요 는 없다는 의미이다. 영화를 보듯이 가만히 망상 을 지켜보면 어느 순간 그것은 자취를 감추고 만 다. 이것이 주시의 효능이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주시와 함 께 알아차림이란 것이 있다. 지속적인 주시, 즉사 띠에 의하여 그 현싱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이 생긴다. 알아차림은 주시와 거의 동시에 일어나
므로 어떤 사람들은 주시와 알아차림을 구분할 필요가없디1고 하지만 엄밀하게 살펴보면 주시하 는 것과 그것을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주시는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라면 알아 차림은 대상에'대한 분명한 파악이다. 이것을 정 지 혹은 삼빠자나라고 한다. 사띠라는 말에는 주시의 뜻이 강하며 그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알아차린다는 의미의 삼빠자 나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며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현 상에 대한 바라봄과 그 현상들이 변화하고 사라 지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과정이 있다. 위빠싸나 는 이 두 가지, 즉 주시와 알아차림을 통하여 정 과 혜가 계발된다.
또 하나는 어떤 동작이 일어나기 전에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할 때는 인연에 이하여 나의 몸이 먼저 물 을 요구한다. 그리고는 물을 찾아 마시는 동작이 이루어진다. 이때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마 시는 것 같지만 물을 마시기 전에 물을 마시겠다 는 생각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 다. 우리가 생각 없이 하는 행위 같지만주시를 하 면 모든 행위의 이전에는 항상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무엇을 하겠다는 이 의도가 모든 업을 형성해 간다. 행위도 물론 그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업을 만 들지만 불교에서는 그 행위(언어활동을 포함한) 를 일으키는 의도가 업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 로 본다. 같은 행위라도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 악 업도 되고 선업도 된다.
예를 들면, 누구를 야단칠 경우에도 내가 화가 나서 그 분풀이로 야단치는 것과 자비심을 바탕으로 그 사람을 잘 인도하기 위하여 야단치는 것 은 외양적으로는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업의 형성 작용에 있어서는 현저한 다름이 있다. 또 보시의 경우에도 보시물 그 자체가 선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시라는 의도가 선업을 만든다. 단순히 주는 행위가 선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 도를 가지고 주느냐에 따라 그 공덕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의 알아차림을통하여 우리 는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선업을 증장시킬 수 있게 된다. 의도의 알아차림을 지속하다 보면 우 리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리 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직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상을 요약하면 위빠싸나 수행에서 처음에는 주시의 대상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시를 좀 더 명확하게 행하고 주시와 함께 그 주시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을 통하여 모든 행위의 이 전에 의도가 먼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렇게 함으로써 무상, 고, 무아를 깨치는 경지에 까 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념의 지속
끊임없이 호흡을 관찰하고 주시와 알아차림 을 통하여 느낌과 마음의 변화 등을 관찰하는 것 은 정념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정념이라고 하 여 앉아있을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념 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길을 떠나 여행을 하는 것 과 같아서 어느 때는큰길로 가다가 어느 때는 샛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큰길을 따라 걷다가 길이 끊기면 산길이나 오솔길로 접어들어 걷다가다시 큰길을 만나면 그 길을 쭉 따라 걷는다.
정념도 이와 같아 여러 가지 방법과 목표를 세 워놓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주된 도로는 사념처 가운데의 신념처 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호흡에 따 른 복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이 큰길이며 주 도로라고 할 수 있다. 복부의 흐름을 주시하다가 앉아있는 엉덩이의 감촉을 느끼거나 행선을 하면 서 발의 감촉을 느끼다가도 다시 호흡에 따른 복 부의 움직임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주시의 대상은 달라지더라도 끊임 없이 정념을 지속해야 한다.
신념처를 닦으면서도 저절로 복부의 움직임에 서 감촉의 주시로 전환되기도 하지만 다시 복부 의 움직 임을 주시하라는 것은 샛길로 가다가 큰 길을 만니2면 다시 그 길을따라 걷는 것과 같다. 뚜 렷하지 못한 것의 주사로부터 뚜렷한 것으로 옮 겨감으로써 정념이 지속되는 것이다.
수념 처에서 느낌을 주시하다 보면 괴롭고 즐거 운 느낌들이 번갈아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뚜렷하지 못한 경우가 있지만 그럴 때는 다시 복부의 움직임을 주시하면 된다. 길을 가다가 물을 만 나면 배로 바꾸어 타는 것처럼 주시의 대상이 바 뀌면 거기에 열중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 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며 정념의 지속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신념 처를 수행하든 법 념처를 수행하든 계속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정념을 지속해야 한 다. 주시와 알아차림을 놓치는 것은 길을 잃는 것 과 마찬가지 이므로 주시가 흐려지면 다시 대상이 뚜렷한 것으로 옮겨 정념을 지속한다. 사념처 가 운데에서 신념처가 대로라면 나머지 삼념처는 소 로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수행자는 신심의 영역이 더욱 넓어지며 스스로의 심리상 태에 대해서도 더 익숙하게 된다. 주시와 알아차림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초심자는 당황할 수 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도취되어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 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정념의 지속이다.
정념을 유지하고 있으면 어떠한 일도(수행의 과정에서) 그릇되게 처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가 만나게 되는 (몸과 마음의) 어떠한 낯선 상황에 서라도 지속적으로 그러한 현상을 주시하고 알아 차리면 그것의 본질과 실싱을 알게 되기 때문이 다. 아무리 그것이 미세하고 미묘한 것이라도 우 리가 정념을 유지하고 주시하며 알아차린다면 그 러한 것은 단지 우리의 주시의 대상이고 알아차 림의 대상에 불과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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