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다사 최후의 아사리 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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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12-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법장담론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수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12-14 15:32 조회 1,172회본문
‘법 밖에 또 바른 법이 있구나.’
밀교 아사리로 현밀겸수 전통 계승
????동문선???? 119권에는 지공의 <부도명(浮圖銘)>이 있어 지공의 생전 행적을 전한다. 선가는 지공을 서천 108대조사로 기록하고 있지만 서구 학자들은 지공을 밀교 아사리로 기록·간주하기도 한다. 지공의 인도 이름은 드야나바드라(禪賢, dhyānabhadra, 1289-1363)로 그는 인도 나란다사 최후의 인물이었다. 기록을 요약하면 지공은 1289년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세에 나란다에 출가해 율현(律賢, Vinayabhadra)으로부터 배웠다. 스승의 권유로 19세 스리랑카를 방문하였고 길상산 보명(普明)을 참배하고 의발을 받았다. 1324년 티벳을 거쳐 원을 방문하였다. 원의 대부대감 찰첩목아(察帖木兒)의 부인이 고려인이었는데 지공에게 출가하여 수도인 연경에 절을 세워 법원사(法源寺)라 하였다.
지공은 고려를 방문하여 원과 고려 양국을 왕래하였고, 외교관계에 개입해 고려를 옹호하였다. 1328년 지공은 인도 나란다사를 본따 회암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불우조’에는,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 길을 따라 회암사로 맞아들였다.”라는 기록과 보우 선사의 비문에 “13세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선사로 출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회암사는 작은 규모 사찰로 지공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다른 기록은, “지공이 여기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나란타 절과 같다.”라고 하였고, 나옹화상이 중창 불사를 비롯해 조선조 왕들도 귀의하면서 266칸의 큰 사찰이 되었고, 한때 절의 승려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회암사는 문정왕후가 깊이 신임한 허응당 보우의 중창도 있었으나, 문정왕후의 죽음 후 거센 유생들에 의해 보우의 죽음과 함께 불타 사라졌다. 또한 광주의 토호 이응준에 의해 지공과 나옹, 무학의 부도마저 파괴되고 말았는데, 당시 풍수사들은 절과 부도 터에 묘지와 묘역을 세우면 크게 길한다 하여 많은 절들이 파괴되어 서원 터나 양반의 무덤으로 변한 일들이 많았다. 지금도 서원 터 마당 한 가운데를 파보면 파괴된 절터의 불구와 유물들이 발굴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훗날 이응준은 7년뒤 순조 8년(1828) 발각되어 유배를 가게 된다.
지공은 원 순제 지정 23(1363)년 입적하였다. 지공이 입적한 이듬해 그를 흠모한 황실에 의해 시신을 향, 옻, 진흙, 베로 처리하여 등신불을 조성하였다가 5년 후 화장되어 달예(達叡)에 의해 일부가 고려로 전해졌다. 나옹 혜근(1320-1376)은 1372년(공민왕 21) 회암사 부도를 세웠고, 혜근의 제자인 무학 자초(1327-1405)도 화장사에 부도를 세웠다.
지공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범어사에 소장 중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 ????지공직지(指空直指)????로 이 책은 연경의 법원사에서 판각, 출판하였으나 조선 성종 6년 광양 백운산 백운암에서 중각하였다. 전반부는 지공을 선사로서 서천 법맥 108대손임을 밝히는 것과 후반부는 각안(覺岸)의 <서>를 비롯한 법문집이 담겨있다. 이외 두 권의 『문수사리무생계경』과 ????선요록????도 전한다.
지공을 밀교 아사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나란다사 출신으로 마지막 학생으로서 현밀겸수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지공은 만년에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속인의 사치스런 옷을 입었다고 하였다. 부도를 모신 화장사에 지공의 좌상이 있는데 지공이 쓰고 있는 보관은 밀교 아사리의 오불관임을 알 수 있다. 진영 오불관 중앙의 불탑은 비로자나 대일여래의 삼매야형을 상징한다.
동문선 권 119 <부도명>에는 지공의 행적에 대해, “가라나국도 외도를 신앙하였다. 그곳 왕이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내가 ????대장엄공덕보왕경(大莊嚴功德寶王經)???? 「마혜사라왕인지품(摩醯莎羅王因地品)」을 보여 주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법 밖에 또 바른 법이 있구나.’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지공이 티벳과 중앙아시아를 경유할 당시 인도는 불교와 외도가 뒤섞여 있었고, 지공이 원과 고려를 왕래할 당시 밀교는 전멸하고 선이 득세하여 불공은 주로 선에 의지해 왕실과 대중을 가르쳤지만 기록들은 지공에 대해서는 주술과 밀교에 능한 스님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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