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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 바꾸면 번뇌가 보리요, 중생이 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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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5-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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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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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6-20 16:20 조회 1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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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 바꾸면 번뇌가 보리요, 중생이 부처다

7. 신(身), 구(口), 의(意) 의 삼밀(三密)

육대(六大)를 체(體)로 하여 연기(緣起)하는 만상(萬相)들은 반드시 모든 작용(作用)을 일으키는 것인데 이것을 신(身), 구(口), 의(意) 의 삼밀(三密)이라 한다. 이를 현교에서는 삼업(三業)이라 하여 좋은 대조(對照)가 된다.

이 삼업(三業)을 정화(淨化)하는 것이 곧 삼밀(三密)이니 즉, 부처님의 가지력(加持力)과 관행자(觀行者)의 공덕력(功德力)과 법계(法界)의 통합력(統合力)에 의하여 정화(淨化)되는 것이므로 삼밀관행(三密觀行)으로 공덕(功德)이 일어나는 것이다. 좀더 확대(擴大)하면 불(佛)이 설(說)한 진실(眞實)한 일 실행(實行)함이 신밀(身密)이요, 불(佛)이 설(設)한 진실(眞實)한 말, 말씀함이 구밀(口密)이요, 불이 설한 진실한 마음 가지는 것이 의밀(意密)이다. 이렇게 수행(修行)하는 것이 심신양면(心身兩面)으로 전인격적(全人格的)인 활동(活動)이 되는 것이니 그 진리를 지성(知性)이나 평면적(平面的)으로만 사유(思惟)에 그치지 않고 전인격(全人格)과 입체(立體)로써 긍정(肯定)함이 삼밀(三密)이 되는 동시(同時)에 행자의 자기확립(自己確立)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사상적(思想的)으로 사유(思惟)함은 이해(理解)와 학수(學修)에만 그치고, 그 진리를 오로지 자기의 생명으로 행위(行爲)하는 전인적(全人的)인 체현(體現)에는 도달(到達)하지 못할 것이다.  

밀교에서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진언문(眞言門)을 개창(開創)한 것은 저 양일승(兩一乘)이 사유적(思惟的)인 선관(禪觀)에만 의(依)하여서 진리를 각오(覺悟)하려 하는 유심적(唯心的)인 그 경향(傾向)을 차원(次元)높이 끌어올려서 삼밀로써 행득(行得)하는 전인적(全人的)인 불이문(不二門)을 개현(開顯)하는 것이다.

이것을 진언비밀보리도(眞言秘密菩提道)라고 함이니 이를 실수(實修)하여 본존(本尊)의 삼밀(三密)과 행자(行者)의 삼밀(三密)이 상응(相應)하여 평등법계(平等法界)를 자증(自證)하게 된다. 즉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일체형색(一切形色)은 법계법신(法界法身)의 신밀(身密)이요, 우주법계(宇宙法界)의 모든 음성(音聲)은 법신구밀설법(法身口密說法)이며 형색음성이밀(形色音聲二密)에서 활동하는 그 진리(眞理)는 그 모두가 법신여래의 의밀이다. 이에 대한 행자들의 관행(觀行)하는 삼밀행(三密行)은 법신여래 그 삼밀이 행자개체(行者個體)에 연기(緣起)하고 분화(分化)하여 있는 것에 다름이 없는 까닭에 본존여래(本尊如來) 삼밀(三密)이나 관행자(觀行者)의 삼밀이나 본래일여평등(本來一如平等)으로 삼삼평등관(三三平等觀)이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한다. 이하 생략


예로부터 번뇌가 곧 보리요, 중생이 곧 부처이며, 사바세계가 곧 극락이라 했다. 너무나 익히 들었던 터라 모르는 이도 거의 없고 워낙 멋들어진 명제라 반론의 여지도 별로 없다. 하지만 진실로 그렇다고 가슴 깊이 체득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어렴풋이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사바와 극락이 둘이 아닌 경지는 실로 지난하다 싶다.


우리는 모두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고자 한다. 그것이 해탈이고 성불이다.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성품이 있으며 그러므로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간단한 일은 아니니 다겁생에 걸쳐 거듭 닦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수많은 불보살님께서도 생을 거듭하면서 인욕하고 구도 정진했다. 길고 험난한 수행여정이 뒤따르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머나먼 미래로 마냥 미룰 일은 아니다.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사바와 극락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수행일 터. 중생의 업을 짓는 신구의 삼업을 부처의 행을 닦는 신구의 삼밀로 바꾸라 한다. 삼업을 삼밀이라 하는 것은 글자 하나 바꾸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즉신성불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부처의 말과 행동과 마음으로 불보살님과 가까워지고 하나 되게 하라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중요한 건 자각이고 원력이며 의지이다. 일예로 부모가 되어보면 안다. 부모님 앞에서는 한없이 여리고 나약하고 의존적인 자식이었지만 아들딸 낳고 기르면서 차츰 단단해지고 굳건해진다. 보호자이자 양육자로서의 자각이, 한 사람을 부모라는 존재로 바꿔준다. 부모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헤아리고 헌신하는 부모로서 살게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듯이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비슷한 사례이다. 물론 그만한 깜냥이 안 되거나 자리를 탐한다면 그 이름에 걸맞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자리와 이름이 주는 책임과 역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할 때 무한히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손목에 단주만 하나 차도 마음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짐짓 모른 척 하고 지나치려고 하다가도 ‘불자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최소한 불자라는 이름에 먹칠은 하지 말자.’ 마음먹게 되고 나아가 모범이 되고자 노력한다. 불자라는 각성 덕분이다. 불공이나 기도를 드릴 때는 그 마음이 더 강렬하다. 수행자라는 자각과 더불어 불보살님이 지켜보시리라, 그리고 이 제자를 지켜주시리라 확신하니 매 순간이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워진다. 원력이 수행으로 이끄는 힘이다.


스스로를 부처가 될 존재라고 믿는 한, 그리고 이번 생에 반드시 부처가 되겠다고 발심하는 한, 진리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커지고 만나는 사람과 부딪치는 경계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중생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하찮게 여겼던 것들이 사뭇 귀하다. 포기하고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내 안의 잠재력과 나만의 장점이 보인다. 숱한 번뇌와 망상들이 솟을 때면 속상하고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것 없이 깨달음은 없다. 진흙에서 피는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아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진흙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아픔과 상처의 경험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기반이 되고 새로운 돌파구가 된다. 번뇌와 망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길이 보인다. 


힘들고 버거운 현실도 싫다는 생각만 벗어나면 달리 보인다. 이만한 일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용기도 생기고 이만하면 해볼만 하다는 자신감도 자란다. 이만하기 다행이라고 받아들이게 되고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성장과 수행에 디딤돌이 됨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꼬인 것은 풀고 맺힌 것은 녹이면 된다. 방향을 바꾸고 관점을 돌리면 번뇌는 보리가 되고 중생은 부처가 되며 현실은 극락이 된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밖에 있지 않다. 우리 모두에게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보물. 이름 없는 비구니 스님의 오도송이라 전하는 ‘심춘(尋春)’에서는 자신 안의 불성을 보라 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지만 봄은 보지 못하고 / 짚신이 닳도록 구름 덮인 산을 헤매고 다녔네. /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니 / 봄은 가지 끝에 이미 한창이더라.’

본존의 삼밀은 법계에 가득하고 부처님의 가지력은 세상에 충만하니 이제 필요한 것은 관행자의 기도정진과 공덕력이다. 설악 무산스님은 안거에 입제한 스님들에게 ‘부처가 되려고 하면 부처가 안 됩니다. 부처로 살면 부처가 됩니다.’라고 했다. 어떻게 삼밀 수행을 닦아야 할지 정확하게 일러주는 말씀이다. 내가 부처로 살면 된다. 바로 지금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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