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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년 장구한 세월만큼 갖가지 사연 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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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07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8-10-06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기고/상식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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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이상철 필자법명 - 필자소속 총지사 필자호칭 각자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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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0 09:21 조회 1,7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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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년 장구한 세월만큼 갖가지 사연 간직”



중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 는 것이 만리장성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며, -. 우주인이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의 대 기권을 벗어나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 다 보면 유일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 있는 인공구조물이 만리장성이라고 세 ‘ 계인에 회자되고 있다.

‘ 70년 대초, 그때까지만 하여도 미국 , 과 중국은 수교관계가 수립되지 않고 ’ 냉전 상태에 있었으며 중국의 공산당 정부는 죽의 장막을 치고 개방을 거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소위 핑퐁외교라고 하 여 미국의 탁구선수들이 죽의 장막을 헤치고 중국으로 들어가 탁구시합을 벌이게 됨을 계기로 하여, 죽의 장막 이 걷히고 당시의 미국 대통령 닉슨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 중국의 모택동 주석 과 회담하고 난 뒤,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이》이창성이라고 하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였던가!

나에게도 만리장성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막 내딸아이가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2d8a22fcdd8c5115e7fd8ffc38391f91_1529454069_0488.jpg
는지, 어느 날 홀연히 직장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한다.

뜻을 꺾을 수 없어 혼자 떠나 보낸 딸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어학 연수 과정을 거쳐 대학원에 입학하여, 청화대학 석사과정을 졸업함으로 5년 여의 중국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본인으로서는 이 감격스러운 자리에 부모님과 함께 하고 싶어 부모님을 초 청하였다.

우리 부부는 형편'상 못 가겠다고 하 였으나 막무가내다.

비행기표만 구입해서 들어오면 나머 지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못 이긴 척 생각지도 않았던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위수여식 및 졸업식 참석 은 차선이고, 자기 있을 적에 부모님 에게 중국 관광을 시켜드리겠다는 속 깊은 뜻이 주목적이었나 보다.

나는 과거 95년도에 비즈니스 관계 로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청 도,대련 지역에만 일주일간 머물렀지 북경 쪽으로는 가보지 못 하였다.

물론, 나의 내자는 처음이다.

우리 내외는 딸아이가 만들어 놓은 스케줄에 따라,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느 3일차.되는 날, 현지 교포에게서 빌려 왔다는, 제 말 표현대로 하자면, 기사 딸린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아침 8시 쯤 만리장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북경 시내를 여기 저기 돌아다녀도 산이라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없 이 넓어만 보이는 북경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쳐 진 산허리를 돌아 우리는 만리장성의 어느 한 부분에 도착하였다.

북경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에 위치 하여 돌아나가고 있는 만리장성은 북 경에서 아주 먼 곳에 위치해 있는 것 이라 짐작했던 평소의 내 생각을 뒤집 어 놓았다.

우리는 산아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산능선의 아래 부분에 위치 한 장성의 관문을 둘러보았다. 관문을 통과하는 도로에는 아스팔트가 잘 포 장되어 있었으며, 대개의 본토인 관광 객들은 관문 옆으로 만들어 늫은 계단 을 타고 올라가 장성의 등을 타고 산정 상의 망루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나의 내자가 무릎 관절이 좋지 못한 관계 로, 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변을 대충 둘러본 뒤, 곧바 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있는 망루를 향해 올라갔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설치해 놓 은 케이블카는 5,6명의 가족단위로 탈 수 있게끔 만들어 졌으며 마치 스키장 의 리프트가 움직이듯이 4〜5111간격으 로 줄지어 달려서. 오르내린다.

산정상 케이블카 정류장에 내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세가 가파르기 그지 없다.

굴러 떨어진다면 주체하지 못 하고 그대로 산골짝아래 계곡에 처박힐 것 만 같다.

우리는 장성 밑으로 만블엄'도은—터 널을 돌아나와 망루에' 올키섰다. 망루 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언제적에 만들 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니, 그날따 라 행운이랄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산능선을 타고 숲의 가림 도 없이, 산세따라 약간은 꾸불꾸불하 게 산꼭대기를 오르고 내리며 장성은 끝없이 뻗어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득한 그 옛날, 이 사람들은 이 험준한 산골짜기에서 양옆으로 가파른 산능성 을 타고 기계나 장비도 없이 이 거대

한 공사를 어떻게 진행하였을까?

나는 장성 윗부분의 등을 타고 걸으 며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성벽의 아랫 부분은 돌을 일정한 규격으로 깎고, 다듬어서 쌓아 올리고 윗부분은 벽돌 을 만들어서 조적하여 만들어졌는데, 그 섬세함이 궁궐의 담장처럼 매끈하 고 빈틈이 없어 물 한 방울도 새어나 가지 않을 것 같다.

성벽의 규모는 그 높이가 능선의 지 형따라 대체로 6끄〜9끄이며 폭은 기부 (성벽 밑부분)가 901,상부가4.5111라고 하며 윗부분의 바닥에는 보도블럭 같 은 것을 깔아 대체적으로 반듯하게 다 듬어져 '있으며, 자동차도 중분히 다닐 수 있는 폭이다. 또한, 그 견고함이 홍 수가 밀어부쳐도 끄덕없을 것 같고, 대 포를 쏘아대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수백 년, 아니 2000여 년 전에 축조되었다는 성 벽이 근세에 만들어진 것처럼 온전하 여 그 긴 세월의 흔적을 느끼지 못 하 겠다.

도대체 장성이 만들어져 버텨온 세 월이 얼마인데 성벽에 쌓여있는.돌 하 나 뽑혀 나간 것이 없고, 벽돌 한 장 깨어진 것이 없으니, 아마도 이 장성 을 만든 황제들의 무소불위권위에 눌 려 세월도, 비바람도 비켜갔는가 보다.

아무튼 만리장성은 그렇게 말짱하게 끝간데 없이 긴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 하며 우리를 맞고 있었다.

만리장성에 대한 나의 교과적 상식 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 고 난 뒤, 북방 흉노족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전부이다.

만리장성은 중국 본토의 북변 몽고 지역과의 사이에 축조된 성벽으로, 동 쪽 산하이관 에서 서 쪽 자이관 에 이르며, 지도 상의 총길이는 2700새이나, 축조된 장 성의 총 길이는 50000에 이른다고 하 니 만리하고도 이천 오백리다.

참으로 놀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 으며,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 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나라때 부터 시작되어, 전국시대에는 연.조.위. 초등 여러 나라가 제나라를 모방하여 국경 지대에 국경지대에 장성을 구축 하였다고 하며, 그 후 8.(3.221년(지금 으로부터 약 2300여년전) 진 나라 의 시황제 가 천하를 통일하자 흉노족의 침략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 하기 위하여 가장 본격적인 축조공사 가 이루어져 서쪽의 깐쑤성  남부 민센01%,민현)에서 황 하강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 산맥을 따 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뚱 , 랴오양 에 이르는 가장 긴 죽조공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뒤 한대에 이르러 무제는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  바깥쪽인 위뭔관 까지 장성을 연 장하였으며, 그 후로도 수,당 등 여러 대에 걸쳐 장성을 보강하고 축조하여 16세기 초엽의 명대에까지 이어져 오 늘날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2000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 을 거치며 축조된 만리장성은 그 길이 만큼이나 거기에 쌓여있는 돌만큼이나 많은 전설과 사연들이 켜켜이 쌓여 있 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장성공사가 한창일 때, 전 국의 남자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공사

현장에 징발되어 갔다고 한다.

또한 징발되어간 사람들은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성의 돌을 쌓으며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을까!

여기에서 나는 만리장성을 찾는 관 광객들에게 관광 버스 안에서 현지 관 광안내원이 들려준다는 설화 한 토막 이 생각난다.

장성공사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는 어느 마을에 젊은 부부가 농사를 지으 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장성 공사장 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일단 장성 공사장에 끌려가면 살아 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니, 이 젊 은 아낙은 평소에도 몸이 약한 남편을 생각하면 남편이 불쌍하고 서러워서 밤잠을 못 이루고 시름 속에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남편이 끌려간 후, 아낙 혼자서는 농사일이 버거워서 주막을 열고 생계 를 꾸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주막에 아주 건 장한 젊은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을 유 숙하게 되었다.

이 주막집 젊은 아낙은 젊은 과객에 게 방을 내어주고, 술상을 차려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이 젊은 과객은 예쁜 젊은 아낙이 혼자 주막을 열고 있는 것을 알고 수작을 걸어온다.

아낙은 이 젊은 과객과 이런저런 얘 기를 나누다 보니, 이 젊은 과객이 일 자무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이 젊은 아낙은 불쌍한 남편 생각이 나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낙은 귀찮게 추근대며 수작을 걸어 오는 이 젊은 과객에게 한가지 제의를 하였다.

내가 편지를 써줄 테니, 장성 공사 장의 어느 감독관에게 전해 주겠다고 약조하면 오늘밤 내 몸을 허락하고 편 지를 전해주고 돌아오면 당신과 결혼 해서 평생을함께 살쎄노라고 하니 이 젊은 과객은 이 예쁜 아낙이 결혼까지 해서 평생을 함께 살겠다고 하니 뽕도 따고, 님도 만났다는 심정으로 쾌히 그러마 하고 약조하였다.

그리하여 아낙은 편지를 써서 과객 에게 넘겨주고 그 날밤 잠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튿날 꿈같이 달콤한 하룻밤을 보 낸 무식한 이 젊은 과객은 편지 내용 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낙이 써준 편 지를 품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장성 공 사장을 찾아 길을 떠났다.

공사장에 도착하여 아낙이 일러 준 대로 감독관을 찾아가 편지를 전달하 니 그 감독관 편지를 읽어보더니 입가 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 그' 아낙의 남편을 불러내었다.

아낙의 남편을 훑어보니, 편지의 내 용대로 약골로 생긴 것이 병약해 보이 고, 이런 힘든 노동을 이겨낼 것 같지 가 않고 죽기 일보직전인 것 같다.

그리하여, 그 감독관은 얼씨구나하 고 덩치 좋고 힘 센 그 과객을 공사장 에 집어 넣고 그 아낙의 남편은 집으 로 돌려보내버렸다.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관리들을 사방팔방으로 파출하였다니 , 황제의 무한한 권력과 자신을 위한 끝 없는.욕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가 없으며, 수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쌓아나간 만리장성이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보다 정작 황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실제로 공사 현장에서는 인부들이 쓰러져 죽으면 그대로 성벽 밑에다 깔 고 공사를 진행하였다고 하니, 그 참 혹하였음이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에 중국에서는 진시황제의 무덤 을 발굴하였는데, 수많은 병사들을 황 제의 시신과 함께 순장(산사람을 함께 묻는 것)하였다고 하니, 자유를 누리 며 개개인의 인격을 최고의 가치로 여 기며 사는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황제 의 권력의 한계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렇게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백성들 의 한서린 죽음과 그 시신들을 깔아가 며 쌓아나간 만리장성을 오늘날의 중 국 국민들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문화 유산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여 자랑하고 즐기고 있으니 선량한 선조들의 한 많 은 삶을 얼마만큼이나 헤아리고 있을 까.

나는 이 글을 쓰다가 뜬금없이 생뚱 맞은 생각이 든다.

만리징성에 쌓아나간 돌의 개수와 우리나라 고려 팔만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자의 숫자와 어느 것이 더 많을까?

아무래도 비교가 되지 않을 것 같 다.

팔만대장경판의 글자수가 턱없이 부 족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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