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페이지 정보

호수 292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3-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3-08 16:04 조회 1,150회

본문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나는 열심히 사는데 왜 부자가 되지 못할까? 나의 친척들은 왜 내게 달라붙어 괴롭히고 돈을 빼앗아 가는 것일까? 건강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왜 병에 걸리는 걸까? 나는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시험에 실패했을까?”


대부분 자신의 의지대로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면 모두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의 노력과 달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있으며 사소한 일에도 자신의 의지가 좌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일이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중생들의 힘과 사물들의 힘이 함께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잡아함경』을 보면 “서로 친하는 법이 있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서로 친하는 법인가. 이른바 살생하는 이는 살생하는 이와 친하고, 도둑질은 음행·거짓말·꾸밈말과 탐욕·성냄· 삿된 사견은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서로 친하다. 비유하면 더러운 물건은 더러운 물건과 서로 화합해 가는 것처럼, 살생은 살생과 삿된 소견은 삿된 소견과 서로 친하느니라.”


이것은 개인의 의지와 업이 개개인에게 관여하고 있지만, 동일한 장소와 시간에 살아가는 공통된 업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자신이 착한 일을 하려고 하지만 타인들의 업력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달리 나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공업중생’이라 합니다. 즉 그러한 업의 그물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행위의 읋고 그름을 알지 못하며 무리 중생들의 말이나 행위가 나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공업중생보’의 업 그물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자신이 지은 업이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사음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고,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지 판단하여 그에 합당하다면 그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교에서의 인과법은 운명론과 다릅니다. 과거의 업은 행함에 따라 현재의 과보를 받고 현재의 지은 업의 행위에 따라 미래의 과보를 받습니다. 또한 과거에 지은 자신의 업이라 할지라도 다른 중생의 업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고정된 운명론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과법과 운명론은 차이가 있습니다. 벼를 살펴보면 벼의 종자에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벼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좋은 벼일지라도 좋은 땅을 만나지 못하면 좋은 벼가 나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조건이라는 연인데 벼라는 근본 원인과 대지와 온도, 영양분이라는 조건이 합쳐서 결과인 새로운 벼를 만들어 냅니다.


다른 경우를 살펴보면 나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행위와 서로 섞이어서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배를 저으면 각자가 지은 방향과 달리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서도 자신만 착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악한 일을 하면 그 가정의 공통의 과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은 열심히 돈을 벌어 저축을 하는데 자식이 마구 써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인과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여러 중생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실을 계속 짜면 옷이 됩니다. 지금의 내가 행하는 업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한 줄의 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 결국에는 옷의 모양과 같은 선악의 과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를 저지르거나 선한 일을 할 경우에 당장에 과보를 받을 수도 있고 수십 년 후에 과보를 받는 경우도 있으며, 아니면 죽은 후에 과보를 받는 경우도 생깁니다. 왜냐하면 『법원 주림』에 “모든 부처님의 신력은 불가사의하고 중생의 업력도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듯이 중생의 업력은 불가사의 해서 시간과 공간에 장애를 받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업을 쌓으면 그 업의 힘 때문에 반드시 좋고 즐거운 과보를 받습니다. 악한 업을 지으면 그 업의 힘 때문에 반드시 악하고 괴로운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지금 좋은 업을 지어야 합니다.


『잡아함경』을 보면 “인에는 나쁜 업의 인, 나쁜 마음의 인, 나쁜 소견의 인이 있다. 그런 중생은 몸이 헐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나쁜 세계 지옥에 떨어진다. 비유하면 둥근 구슬을 공중에 던지면 그것은 땅에 떨어져 굴러서 그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나쁜 업의 인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에 산다.“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말고 왜 나쁜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면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긴 원인이나 이전의 행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업을 믿지 않은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업을 믿는다는 것은 인과법을 안다는 것입니다. 업이라는 것은 바로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기차를 보면 기관차의 힘으로 나머지 객차나 화물차는 따라가게 됩니다.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는 갈애의 기관차가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인연 있는 중생은 자주 부처님을 찾고, 자주 법문을 들을 때 선한 업을 지을 수 있습니다.


『대장엄경론』을 보면 “그대는 저 수레를 이끌어 가는 소를 보았는가? 수레가 가지 않을 때에는 소를 채찍질해야 하고 수레를 채찍질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몸은 수레와 같고 마음은 소와 같은 지라,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그대는 마음에 불을 지펴야 하거늘 왜 쓸데없이 몸을 못 견디게 하는가?”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업을 잘 단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삼악도에 떨어지고 사람으로 환생한다고 할지라도 비천한 사람이 되어 남의 미움을 받아서 사람들은 그와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입과 뜻으로 어떤 행위를 하였는가를 잘 살펴보고 나쁜 행위를 버리고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노력하면 두려움과 공포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큰 폭풍이 오면 파도는 크게 일고 조용한 바람이 불면 파도는 고요해지듯이 자신의 선악행위의 바람에 따라 고통의 업 파도는 크게 일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합니다. 지금 고통과 불행의 업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삼보와 인연을 맺고 믿음을 굳건히 하고 선한 행위를 가정과 사회에 실천해야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