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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화의 침략에 맞서 부처님의 법으로 항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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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2-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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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2-07 15:26 조회 1,0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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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 대성사 일대기 (28회)

자유와 평화의 침략에 맞서 부처님의 법으로 항거하다

경전을 펼치면 그곳에 진리의 세계가 있으니 어느 때라도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면 진실한 마음으로 그 가르침을 만나라는 당부였다. 당시 현교 교단 어느 곳도 통일된 성전을 갖추지 못했던 실정에 비추어 보면 대성사의 역경과 경전을 반포하는 불사는 시대를 앞서간 길잡이가 된 것이다. 밀교 수행으로 산중 사찰과 출가자 중심의 불교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수행과 수행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은 불교의 흐름을 바꿀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 써서 누구나 뜻을 알 수 있고 마음에 새겨 실행할 수 있게 한 ‘응화성전’은 수행뿐 아니라 현실 세계의 지표가 됐다. 


당시 불교계가 비구·대처 분쟁과 정화의 소용돌이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이끌 지도력을 보이지 못할 때 신생 밀교 종단의 이 같은 행보는 혼란한 한국 현대불교사에 큰 의미가 있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종단의 체계에 맞춰 새로운 해석과 편찬을 한 것은 시대를 앞서간 일로써 대성사의 종교적 통찰력의 결과물이다. 적어도 밀교 수행자들은 어두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를 향해 길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진각종은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지만, 여전히 종단의 중심축은 대구에 있었다. 대구는 종단의 주요한 기반인 종립학교 심인중고등학교뿐 아니라 교도 층도 여전히 많고 활발했던 곳이다. 종단 인재도 대구와 경북 일원에 가장 많이 포진하고 있었다. 특히 종단의 발상지인 대구 남산동 심인당은 여러 모로 상징적인 곳이다. 대성사는 1954년부터 남산동 심인당에서 교화하며 서울을 오가면서 교단 일에 전념했다. 서울은 교도들의 결집과 대사회적 행사가 아직은 어려운 제약이 있었지만, 대구는 언제든 종단의 결정으로 대중 집회와 사회적 발언이 가능한 이점이 있었다.


세상과는 달리 이 시절 대성사는 수행과 생활에서 평온함을 누리고 있었다. 전쟁 중 잃을 뻔했던 외아들은 학교로 복귀해 학업을 마치고 은행에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남산동 관사는 찾아오는 교도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았다. 언제나 편안히 대해줄 뿐 아니라 신앙의 문제와 현실의 문제 어느 것이나 진심으로 길을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스승은 교도의 사정을 잘 알아 보살피고 그를 위해 불공해야 한다는 것은 당시부터 대성사가 세운 스승의 원칙이었다. 


“교도로서 병이나 급한 일이 생길 때는 반드시 스승에게 알려야 한다. 스승은 그 사정을 잘 알아서 찾아가 살필 일이 있으면 찾아가야 하고, 정진해야 할 것은 정진하고 희사해야 할 것은 희사하여 모든 재해와 고난을 없애주고 좋은 일이 일어날 때까지 항상 그를 위해 불공해 주어야 한다.” 


가르침 그대로 교도들의 생활을 살피고 좋은 일이 생기도록 이끌었다. 불공이 필요하면 불공하고, 재앙을 물리칠 필요가 있을 때와 정진이 필요할 때를 가려 일렀다. 종교는 단순히 옛 가르침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난을 구제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자연히 남산동 사옥에는 사람들이 몰렸고, 심인당도 늘 활기가 넘쳤으며, 새로운 교도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혼란은 막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국제정세와 국내정치 상황은 전후의 평화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상이지만 종교인 또한 국가와 사회의 일원인 것도 사실이다. 대성사는 일제 강점하에 겪었던 일들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국가의 운명이 혼란을 겪을 때 종교와 수행 또한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성사는 진각종의 대표인 선교로서 세상사에 대한 불교적인 발언이 필요할 때마다 앞서서 지혜를 제시했다. 종단을 대표할 만한 위의를 갖추고 현실을 꿰뚫는 문장력으로 세상을 향해 종교적 가르침을 펼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58년 3월부터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 움직임이 있자 전국적인 항의가 일어났다. 3월 16일 대구역 광장에 정치 사회 종교단체들이 모여 북송반대 궐기대회가 열렸다. 대성사는 종단의 대표자로서 그 자리에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전문을 낭독하였다. 자유와 종교, 그리고 국가관은 대성사의 확고한 신념이다. 자유가 없으면 종교의 생명도 시들어간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며 자주와 자각의 근거라는 것이 대성사의 믿음이다. 자유세계의 생명이 곧 자유와 종교에 달려 있기에 자유를 억압하거나 타인의 자유를 박탈할 만한 행위를 보면 당연히 항의하는 것도 종교인의 책무라고 가르쳤다.


“만약 고귀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면 그것은 반드시 착한 사람이 되는 조건이 될 것이다. 만약 악인에게 자유를 준다면 그 자유는 방종으로 바뀌어 다른 사람과 대중의 자유를 침해하고 짓밟게 된다. 그 피해와 독이 주는 폐해가 커서, 종교로써 가르쳐 인간성을 바로 잡은 후에 자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자유는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기 삶을 결정해 나가는 자주(自主)이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스스로 다스려 나갈 수 있는 자제(自制)이다. 자주가 있어야 자각(自覺)이 있고, 자제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계행(戒行)이 된다. 선을 행하게 되면 곧 자주가 바로 선다. 자제는 곧 악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자유와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지고 곧 자유세계의 생명인 것이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전쟁터가 되고 무간지옥으로 변했던 현실에서 벗어나 평화의 세계를 꿈꾸었으나 현실은 또 다른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혼돈 속에서 대성사는 국가와 민족과 종교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밝혀 앞장서 나갔다.


1959년 세계 불교도들이 함께 아픔을 느낄 비극이 벌어졌다. 불교국가로서 특히 밀교 수행의 정수가 보존된 신정국가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을 맞았다. 소위 서남공정이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인민해방군은 종전이 되자마자 쓰촨성에서부터 티베트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잘 무장된 병사들은 거칠 것 없이 종교적 가르침이 지배하는 세계의 고원으로 밀어닥쳤다. 유물론과 공산주의의 관점에 승려와 봉건귀족들은 인민을 착취하는 계급으로, 그 자체가 타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티베트 암도와 캄 지방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현대 무기로 무장하고 한 차례 전쟁을 통해 훈련된 병사들 앞에서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승려와 사원이 파괴되고 제14대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했다. 3월 22일 라싸가 함락되고 포탈라궁이 인민해방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대성사는 종도와 함께 대구역 광장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침략에 항의하는 결의문과 유엔과 미국 지도자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념 대립으로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성사의 의지는 확고하였으니, 자유와 평등의 갈등에 대한 해법은 불교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람들은 다 자유와 평등을 말하나 둘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개념이다. 민주국가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자유이다. 자유와 평등은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로우면 불평등해진다. 그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통제하면 부자유하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를 통제한다. 그런데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걸인이요, 가장 평등한 곳은 감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걸인이 되는 것과 감옥에 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불교는 자유와 평등을 다 같이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다. 해탈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한꺼번에 얻는다. 불교처럼 자유로운 것이 없고 평등한 가르침이 없다.”


전후 이념의 갈등과 정치적 대립에 대한 불교적인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이후에도 대성사는 사회적 문제를 대할 때 물러서서 방관하지 않고 불교가 내놓을 수 있는 현실적 대안과 방향을 줄곧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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