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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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2-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눈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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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2-07 15:21 조회 1,068회본문
시작과 끝을 전제로 제시된 닫힌 세계관
불교는 무시무종…현대과학 발달로 입증
어려서 궁금했던 것 중에 “어떻게 세상이 만들어졌을까”였습니다. 그 궁금증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 것이 성경의 내용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에서부터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할리우드에서 제작하여 영화로 널리 알려주었기에 종교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을 제외한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신으로부터 창조된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 자연을 이용하여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풍요롭게 하여왔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에 물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에는 이런 세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불교는 붓다의 깨달음에서 출발하였는데 그 내용은 열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는데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고 천당이나 극락처럼 어디론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는 인도 종교 중에서도 슈라마나 전통위에 있는 불교와 자이나교에 국한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중시하는 흐름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까요?
색수상행식의 오온(五蘊)에서 대상이 색(色)이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을 수상행식의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색수상행식의 무게중심은 색이라는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수상행식의 정신적 인식과정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십이처를 말하는데 인식주체인 육근(六根)과 인식대상인 육경(六境)을 합쳐서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과 대등하게 설정되어있습니다. 인식주체는 “나”이고 인식대상은 세상입니다. 저는 한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우리는 모두 경험할 수 없으니 인간의 인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단 “내”가 인식하는 세계는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연기(緣起)의 원리에 의해 중중무진의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경지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객관적 대상은 다르지만 그것을 보는 주관적 인식행위의 과정은 모두 같다는 접입니다. 색수상행식을 인식론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원리로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인식과정을 체계적으로 세밀하게 설명하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은 과학을 포함해서 불교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불교신도나 스님에게만 해당되는 닫힌 체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창조론이 닫힌 체계에 해당합니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세상에 내재하고 있는 신의 섭리를 아는 것이 곧 과학의 출발이었습니다. 과학은 본래 고대에는 자연 철학으로 철학의 한 분야였고 서양의 중세에서는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창조론과 결별하게 됩니다. 과학과 창조론이 병존할 수 없을만큼 차이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종교가 아니라 과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현대 물리학의 주장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조론은 시작과 끝을 전제로 하여 성립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창조할 시간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과 비슷한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냥 한 성인의 도덕률 정도로 생각해왔던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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