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Kumaraj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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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17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7-12-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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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6 13:07 조회 2,804회본문
구마라집(Kumarajiva)
기구한 운명 속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이국땅에서 펼쳐야 했던 삶... 자신하나 때문에 자신의 나라가 멸망당하고, 동(東)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중국에서 천 수백 년을 걸쳐 수많은 산 스크리트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경전 은 거의 7,000여권에 이르고 번역가도 200 여명이 넘는다. 그중에 가장 뛰어나 고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친 역경가는 단 연 5세기 초의 구마라집과 7세기 중엽의 현장이다. 그 둘은 중국 역경사의 이대역 성(二大譯聖)이라고 칭하는데 현장은 75 종 1,335권을 번역하여 번역 양으로는 가 장 많지만 중국, 한국, 일본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경가는 구마라집이다. 구마라집이야말로 중국 불교사에서 영 원히 그 빛이 꺼지지 않는 인물이며 그의 도래는 실로 중국불교에서 볼 때 일대 전 환기를 맞이하였다.
그가 번역한 역경문(譯經文)의 완비(完 備)와 번역어의 유창함은 기존의 역경 방 법에 일대 전진을 가져왔고 불교교학은 그로 인해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 에 그의 명성은 자자해졌으며 후진(後秦) 의 왕 요흥(姚興)은 그의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결혼까지 강제로 시 켰고 북위(北魏)의 효문제는 그의 자손을 찾아내어 벼슬을 주었을 정도였다. 구마라집은 구자국 출신으로 7세에 출 가하여 어머니와 함께 서역의 여러 나라 를 다니면서 불교를 공부하였는데 겨우 열한 살의 나이로 외도들과 토론하여 그 들을 굴복시켰다고 전해질 정도로 신동 이었다. 그가 계를 받은 20세에 이미 그의 명성 은 멀리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전진(前秦) 의 왕 부견(符堅)은 소문을 듣고 여광(呂 光)에게 명하여 구자국을 토벌하고 구마 라집을 데려오게 하였다. 여광은 구자국 을 쳐서 구마라집을 데려가던 도중 전진 이 멸망하고 후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장(古藏)에 머물면서 후량(後涼)을 세웠다. 이리하여 구마라집은 여기서 16 여년을 머물다가 후진의 요흥에 의해 비 로소 장안에 오게 되었다. 요흥은 구마라 집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국사(國師)로 서 예우하며 서명각(西明閣), 소요원(逍遙 圓)을 하사하여 역경장으로 사용하게 했 다.
이렇게 그는 장안에서 12년 동안 역 경에 종사한 후 70세(413)를 일기로 입적 하였다. 그가 중국 역경사에 남긴 위대한 공적 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특히 종래는 개 인적인 차원에서 역경장이던 것이 국가 적 사업으로서 시도된 것도 구마라집이 처음이며 구마라집이 구사한 번역어의 적절함과 유창하고도 정확함은 예전의 번역방법을 일신시키고도 남음이 있었 다. 그의 번역 경전은 「출삼장기집(出三 藏記集)」에서는 35부 294권이라 하고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서는 74부 384권이라 되는데 어찌되었든 300권이 상의 대번역 사업을 완수했으며 이 경전 들이 후세 불교교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 하였다.
대지도론(大智度論) 같은 대승론부들 이 구마라집에 의해 처음으로 중국에 전 래되었으며 이로 인해 삼론종, 성실종의 기초가 되었다. 반야경(般若經)을 포함한 많은 불교 경전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고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 또한 법화경 아미타 경의 번역본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 하고 있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 시색(空卽是色)이라는 유명한 문구도 구 마라집에 의해 나온 것이다. 신역(新譯)이 라 불린 당(唐) 현장(玄奘)의 번역에 대해 구마라집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 며 현재까지도 존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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