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진리와 자주정신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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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7-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법장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7-08 13:40 조회 460회본문
6월 13일 부산 정각사에 개최된 2024년 한국밀교학회 춘계학술대회의 한 발표를 맡았다. 대회의 대주제는 원정대성사의 사상과 밀교였지만 원정대성사 주제의 논문은 필자의 논문 한 편에 그쳤다. 발표논문의 제목은 「원정대성사 밀교사관의 계승과 과제」였는데 발표는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원정대성사의 생전 행장에 대한 기록과 평가가 다른 점이 있어서 다음 연구로 미뤄두기로 했다. 구상해 두었던 마무리 화제를 마음속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런 논평자의 질문에 미쳐 답을 못한 채 마무리 되었다. 나름 중요한 내용이었는데, 요약하면 첫째, 이원진리(二元眞理)에 대해 인도불교의 밀교형성에 기여한 대승불교 사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헌으로 보면 오학처(五學處)를 구성하는 계율, 구사, 반야, 중관, 논리학이다. 다섯 과목의 내용은 동아시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 불교사상으로 풀이하는 것보다 쉽다. 중국의 그것은 화엄이나 천태, 삼론의 철학으로 선과 뒤엉켜 매우 난해하기 때문이다. 자주 언급한 말이지만 모두가 중국의 한자와 이로부터 파생된 문학이나 사유방식에 기인한다. 한글과 우리말은 불교어로서 한자와 한문보다 우수하지만, 이를 불교어로써 활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불사가 될 것이다. 이런 논리의 배경은 원정대성사의 사상이 인도, 동아시아, 한반도를 관통하는 폭넓은 포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주정신에 대한 것이다. 자주정신은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원정대성사의 뜻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총지종이 의궤를 개방하여 일본밀교와 티벳불교 겔룩빠의 의궤를 연구토록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종조법설집????에서 원정대성사는 결연관정(結緣灌頂)에 대해 밀교에 많은 본존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결연관정은 본존과 인연을 맺는 것이다. 본존들은 태장계만다라나 금강계만다라에서 보이듯 많은 제존들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수행자는 근기에 따라 지혜존으로서 문수보살, 자비존으로서 관세음보살, 보현행원의 보현보살, 악취중생 구제의 지장보살이 자신의 본존이 될 수 있다. 중기밀교에서 나아가면 후기밀교시대 많은 경궤들이 결연관정과 다양한 본존을 중심으로 시설된 것을 볼 수 있다. 결원관정은 요약하면 근기에 따른 맞춤식 교육이며, 다양한 중생의 능력과 소질을 고려한 의식 개발이라 할 수 있다. 궁극적 목표는 성불에 이르러야 하지만 구경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적 실지(悉地)를 위해 결연관정이 필요하다. 티벳불교의 링린포체 전기를 보면 아사리가 티벳에 있었을 때 많은 스승으로부터 관정을 받은 기록을 빼곡이 전하고 있으며, 절친인 티장린포체와 함께 서로 다른 본존의 관정을 전법아사리와 전수제자의 입장을 바꾸어 시설한 기록을 보이고 있다. 밀교의 꽃은 본존수행과 결연관정이다. 그 열매는 본존을 성취하고 공덕을 중생과 공유하는 것이다. 발표가 힘들었던 보다 더 나아간 이유는 원정대성사의 못다 한 포부와 원력이 느껴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법보신문>에 난 대대적인 기사를 보며 학술대회의 성료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많은 종학의 스승과 선승들이 공유한 정보였을 것이다. 최치원의 ????고운집(孤雲集)????에 보면 <지증화상비명>이 있는데 지증화상 도헌(道憲, 824~882)에 대한 찬과 더불어 밀교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다. 인용하면, “현교는 겉으로 드러내고[明示] 밀교는 비밀히 전하는[秘傳] 바, 아침에는 범부였어도 저녁에는 성인이 되게 함에 불교의 가르침이 원래 변한 것은 없지만 돈오(頓悟)의 선풍이 발연히 흥기하였다. 그 종취를 시험 삼아 엿보아 비교해 보건대, 닦되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고,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였다. 고요히 있을 때에는 산처럼 서 있고 움직일 때에는 골짜기처럼 응하였으며, 무위(無爲)의 유익함은 다투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하였다. 현밀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무수한 근기를 위한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다. 오도에 이르는 것은 현교이고, 삼신을 증득하고 실지를 성취하는 것은 밀교이다. 선의 견성(見性)은 법신을 증득하기 위해 아집, 법집의 탈을 벗는 계기를 얻은 것이라 말하고 싶다. 오도(悟道)라고 할 때 비로소 삼신을 성취해 제불의 방편을 증득하는 인연이 비롯된다고 상상해 본다. 고운이 도헌에 대해, “고요히 있을 때에는 산처럼 서 있고 움직일 때에는 골짜기처럼 응한다”라고 하였는데 옛 선사들의 온전한 면목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원정대성사는 ????종조법설집????에서, “밀교 가운데에는 가장 저급한 욕망과 가장 숭고한 이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가장 범속한 것에 가장 숭고한 진리가 담겨 있지 않으면 불교의 깨달음이 아니다. 붓다는 중생의 온처계(蘊處界)가 곧 법이라 했다. 작금의 선(禪)을 지키는 것만 능사로 여기고, 지키고 떨쳐버리는 분별이 있으면 아마 주인공은 이승(二乘)의 해탈을 넘지 못했으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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