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인으로 선출, 하월곡동 현 진각종 총본산 불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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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2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3-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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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3-12 13:14 조회 1,047회본문
총인으로 선출, 하월곡동 현 진각종 총본산 불사의 시작
종립 심인중고등학교는 진각종이 지향하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반이 되었다. 오랜 기간 교육자로 일했던 대성사의 경력은 학교 운영과 교육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사회와 학교 모두 큰 혼란에 휩싸였다. 군사정부는 학교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여 교원 인사도 좌지우지하려고 하였다. 대성사는 외적인 압박 속에서도 종교적 정체성과 정당성을 내세우며 여법하게 교무를 이끌어 갔다. 학생들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이를 위해 10월 14일부터 전교생을 대상으로 매주 수요일 1시간씩 심학 시간을 만들었다.
이 날만큼은 대성사가 직접 학생들에게 수행과 마음을 통해 현실을 바로 대하는 법을 가르쳤다. 심학 시간은 회당 대종사와 대성사가 맡아 직접 밀교의 가르침을 설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종립학교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종교적 원칙과 교리에 따른 마음공부라는 사실을 확실히 했다.
학생들에게는 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고 값진 것인가를 그들의 눈높이에서 설명했는데, 대성사가 전하고자 했던 불교의 기본적인 내용은 이와 같은 것이다.
“불교는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 완성을 추구한다. 내세를 위해 천상세계에 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런 부분 또한 방편을 들어 가르친 것이며, 현세에 있어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닦고 얻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불교가 염세주의적이거나 내세주의를 지향하는 것처럼 비치는 면도 없지 않으나 대성사는 심학 시간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종교적 탐구와 실천이 필요한 부분을 강조했으니 종립학교의 정체성을 위한 특별한 교육 시간이 되었다.
“현실적 문제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도를 닦는 일은 종교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영원한 진리를 얻으려는 인격적인 노력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배우고 아는 것을 넘어 반드시 실천 수행이 따라야 한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현실은 결코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또한 원인 없이 빚어진 것도 아닌 것이다. 오직 인간 스스로 책임지고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인간성의 가치를 닦는 데 물러서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사회적인 혼란까지 겹쳐 갈피를 못 잡을 수도 있을 청소년기에 대성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직접 들려준 심학 시간은 영혼의 샘물이자 종립학교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밝혀 진정한 인간교육을 선도한 표본이 된다.
이 무렵 대성사의 남산동 집에는 가족이 늘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 순표가 자녀와 부인을 대구로 보내 대종단 개혁을 추진하던 1970년 진각 종조전 앞성사를 모시게 한 것이다. 심인당과 종단 일에 바쁠 때 집에서 손녀의 웃음을 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절 대성사의 소소한 기쁨이 되었다. 대성사를 잘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매사에 엄밀함을 회상한다. 늘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허튼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정해진 일은 때와 시기를 미루지 않았다. 하얼빈 시절부터 몸에 밴 이런 정확함은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그 전말을 깨쳐 해결할 때까지 몰입하는 진지함으로 이어졌다.
진각종 시대를 열고 초창기에 수행법과 의궤를 서둘러 정하면서 대성사의 마음 한편에 명료하지 않은 의심이 늘 남아 있었다. 특히 진언수행의 중심이 된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의 경전적 근거를 찾기 위해 마음을 다하였는데, 당시 상황은 대장경 전체를 낱낱이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라 미뤄두고 후일을 기약할 뿐이었다. 종단 안팎의 일이 분주하였고 종단 총책임자인 선교라는 막중한 직을 맡고 있었기에 교리 연구에만 힘을 기울일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창종 이래 진각종은 육자진언 염송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았다. 육자진언이 관세음보살의 본심이며 이로써 심인의 상징으로 본 것이다. 비로자나불을 교주로 삼고 수행의 본체는 관세음보살을 세우고 있었다. 때로는 관세음과 아미타불의 명호를 호명염불할 때도 있었으니 종교 체계가 완비되기 전이라 혼돈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밀교의 기반에서 수행과 신앙 전반을 완전히 체계화하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교판(敎判)에 대한 미흡함은 늘 대성사를 압박하는 요인으로 남았다. 방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밀교의 입장에서 종합하고 체계를 세우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은 바른 신앙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 대성사의 견해였다.
“가정에는 모름지기 조상의 내력이 필요하고, 국민은 곧 국가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교상판석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성사의 입장에서 진각종은 신흥 종단으로 힘찬 걸음을 내디뎠지만, 밀교적 원리로 불교 전체를 회통하여 교리와 체계를 온전히 세우기에는 미흡한 면이 있다고 보았다. 밀교 수행을 내세웠지만 정통 밀교로 가는 길은 멀다고 파악하였다. 이는 후일 새로운 길을 열고 진각종에서 나오게 되는 중대한 요인이 된다.
생자필멸, 태어난 것은 반드시 소멸의 시간을 맞게 된다. 운명의 시간이 닥쳤으니 1963년 10월 16일 대구 침산동 심인당, 지금의 불승 심인당에서 회당 대종사가 열반에 들었다. 대종사는 그해 회갑을 맞았으나 세상과 인연을 남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드러난 지병으로 육신의 기력이 다하게 되었다.
열반에 들기까지 세 차례 뒷일을 당부하였는데, 대성사는 종단 책임자로서 모두 참석하여 회당 대종사의 뜻을 듣고 후 일을 함께 논의했다. 두 분은 서로 말이 필요 없이 눈만 마주쳐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밀교를 중흥하자는 두 성인의 기약은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맺은 결의였기 때문이다. 대종사는 임종 전날 마지막 법문을 남겼다.
“옛날에는 의발이요 이제는 심인법이라.”
심인불교라는 새로운 불교를 시작한 지 17년, 세속의 인연 62년을 밀교를 세우는 일에 바치고 생을 마쳤다. 장의는 진각종 종단장으로 치렀고 장의위원회 위원장은 대성사가 맡아 밀교 중흥의 씨앗이 된 회당 대종사가 가는 길을 여법하게 밝혔다. 돌아보건대 사람의 인연 또한 법계가 정한 것이며, 대성사와 회당 대종사의 만남은 이 땅의 밀교를 열었으니 그 인연의 무게는 무겁고 컸다.
회당 대종사의 유지를 잇기 위해 1964년 3월 23일 종제 개편과 종헌 개정을 위한 논의가 열렸다. 종단 최고위직으로 총인(總印)이란 직책을 새로 만들었다. 선교에서 인정, 그에 이어서 총인 직이 생겨 진각종을 이끌어나가게 된 것이다. 행정기관으로 통리원과 의결기구로 종의회, 종단 전체의 감사를 맡은 사감원 등의 새로운 체계로 다시 태어났다. 그다음 날인 3월 24일 바뀐 직제와 절차에 따라 주요 임원이 선출됐다. 종단을 이끌 총인으로 대성사가 선출되었다.
이미 회당 대종사의 유지가 그러했고 종단 내 스승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터라 대성사의 총인 직 수락은 진각종의 미래에 대한 종단 전체의 기대와 염원의 결과였다. 진각종 초대 총인을 대성사가 맡은 것은 종단 전체의 뜻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종단의 정식 명칭으로 ‘진각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대성사가 총인 직을 맡으면서 이룬 일 중 눈에 띄는 것은 현재 진각종 총본산이 있는 하월곡동 대지를 매입하여 불사를 시작한 일이다. 종조비와 사리탑을 비롯해서 회당 대종사의 위업을 추모하는 일도 흩어짐 없이 진행됐다. 아직도 하월곡동 총본산 한켠에 자리잡은 추모비의 문장은 대성사가 남긴 것이니 진각종에 남긴 자취는 지울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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