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번역·의궤제정·스승 교육에 전념···진각종 선교로 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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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0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1-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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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1-07 14:52 조회 1,064회본문
누구나 대성사를 만나면 첫째는 엄숙함에 기가 죽고, 둘째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자상함에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교인을 대하는 자세는 자기 수행의 과정과 결과일 뿐 아니라, 몸과 마음과 말이 진실에 다가선 증거가 된다. 세상 사람은 스승의 말과 행동을 통해 진리에 다가설 수 있고, 거짓에 절망할 수도 있다. 한쪽에서 불교를 내세우며 전쟁을 벌일 때 대성사는 오롯이 진실한 모습으로 세상에 밀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교인들의 질문은 비단 교리와 수행에 대한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누구나 다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심인당을 찾았다. 늘 한결같이 “불공 잘 하면 감응을 얻는다.”고 답했지만, 반드시 종교적인 가르침만 준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서 일어난 번뇌는 마음잡는 길을 알려줬다. 세상살이의 고난은 일체가 무상하며 상황과 조건은 언제나 변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들어 세세히 설명했다. 미움으로 분노하는 이들에게는 육자진언으로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얻는 길을 일러주었다.
누구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알아듣도록 이야기했으니 대성사를 만나 말하는 것만으로도 얽힌 마음의 가시풀이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차츰 주변에 사람들이 모였다. 스승들도 심인당의 운영과 교도를 대할 때 어려움이 생기면 대성사를 찾아와 속을 털어놓았다. 어떤 경우에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진심을 다해 자신이 아는 바를 나누었다. 당시 대성사로부터 길을 찾은 이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평범한 이야기 같으나 남이 보지 못한 길을 알려주셨다.”
“어렵지 않게 일상적인 말로 깊이 있는 세계를 전해주셨다.”
가르침의 가피를 입은 이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그 전하는 방법이 삿되거나 경전을 벗어나거나 확신 없는 말이 아니라 듣는 즉시 매듭이 풀리는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한 번 들으면 모든 의문이 풀리는 확실한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말은 쉬우나 길을 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자기 앞에 막힌 길이 있으면 ‘대성사를 찾으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됐다. 삼밀의 가르침은 경전 속 내용이 아니라 현실에서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실제가 됐다.
경전 번역과 의궤의 제정, 그리고 스승들에 대한 교육에 전념하고 있을 때 종단의 미래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큰 결정이 내려진다. 당시 진각종은 종단의 최고 지도자를 ‘널리 가르침을 펼친다’는 뜻으로 선교(宣敎)의 칭호로 불렀다. 초대 선교는 회당 대종사이다. 명실공히 종단을 이끄는 최고 책임과 권한을 가진 이가 진각종 선교이다.
종단이 점차 안정기를 지나 발전기에 들어서면서 조직은 커졌고 한 사람이 행정과 교법을 모두 통솔하기보다 이원적인 체제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서 최고위인 선교 위에 상징적으로 교법의 대표 격인 인정(印定)이란 지위를 새로 만들었다. 인정은 심인(心印)의 인정(認定)을 뜻하는 말이다. 현교 교단의 종정(宗正)에 해당하는 지위이다.
1957년 11월 18일 대성사는 진각종 선교로 추대된다. 전쟁 중 입교하여 그야말로 이른 시일 동안 교단의 기틀을 잡고 교리를 정비하는 일에 헌신한 결과를 종단 안팎에서 공인한 결과이다. 1955년에 정사로 승진한 후 2년 만의 일이니 대성사에 거는 종단의 기대를 읽을 수 있다. 종단의 크고 작은 일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교당을 세우는 건축 불사까지 대성사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오랜 공직생활과 꼼꼼한 성품 탓에 장부를 살펴 작은 허점도 용납하지 않았다. 실수나 잘못이 드러나면 당사자를 힐난하기보다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잘못을 바로 잡아 잘못을 공덕으로 회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일하는 이들로부터 원망 사는 경우가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이들은 장부를 펼쳐 눈길만 스쳐도 잘잘못이 드러났다고 한다.
종단 일을 하다 보면 대성사에게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을 자주 겪게 된다. 대성사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상대에 휘둘리며 자기 운명과 이해를 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말로 타일렀다. 어느 누군가의 행동으로 자기 마음의 혼란과 신앙의 곡절을 겪게 된다면 시비로 진리를 훼손하는 일도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공평함을 잃지 않았고 잘못은 적절한 방법으로 바로 잡았다. 한 번 잘못을 저지른 이도 그 경과에 따라 다른 책임을 주어 잘못을 만회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종무를 이끌어 종단의 성장을 탈 없이 주도했던 것도 선교로서 대성사의 업적이었다. 로써 교단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겪을 수 있는 잡다한 시행착오를 건너뛰고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전국 심인당 건설도 대성사의 관리로 여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중에도 교리와 수행체계의 정비에 특히 힘을 기울였는데, 무엇보다 밀교 의식을 정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의식과 의궤가 밀교의 생명이며 비밀한 힘을 체험하는 핵심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의식이 없는 밀교란 현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대성사의 지론이다.
“밀교란 의식을 주로 한다. 의식이란 특정한 시기에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그것이 의식이요 제전祭典이다. 또 특정한 장소가 일반의 장소와 구별되는 것도 종교의 특색이
다. 예를 들면 도량, 불단佛壇 등과 용구用具, 언어, 행동 등이 구별되어 일상생활과 달라서 시간時間, 공간空間, 물체物體, 동작, 언어 등이 성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상대하여 일상생활을 세속적世俗的이라고 하고, 순불교적인 생활을 출세간적出世間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법계의 감응이 있으려면 밀교 의식이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밀교의 각종 불공법과 의궤, 그리고 진언의 규정은 대성사가 현대 한국 밀교 의식을 기초부터 쌓아 올린 대표적인 성과이다.
1958년 드디어 경전의 정수를 모은 ‘총지법장’이 완성돼 4월 20일 대구 남산동 심인당에서 배포 불사가 진행됐고, 6월 15일에는 ‘응화성전’이 간행됐다. 밀교의 뼈와 살이 이루어진 것이다. 왜 이 시대에 밀교 수행이 필요한 것인지, 현교와 어떤 부분이 같고 상이한 것인지가 정립되었다. 경전을 배포하면서 대성사는 늘 간절히 당부했다.
“경전 말씀은 부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르침을 펼친 것입니다. 그러니 경을 대할 때는 언제나 지금 내 앞에서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이 가르침을 편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길이 되고, 불보살님의 가지를 입는 방법이며, 법계와 일체가 되는 법입니다. 이제 경전이 갖춰졌으니 진리로 향하는 길잡이 삼아 바른 길로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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