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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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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33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9-03-3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법상인 전수의 總持法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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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2-11 16:03 조회 5,2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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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
변화의 노력은 곧 ‘수행’의 과정

변화의 노력은 곧 ‘수행’의 과정 

 불공은 간절한 소망으로


종조님은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월초 불공과 새해불공 등 여러 불공의 기간을 효 율적으로 정비했습니다. 특별한 기간으로 정 해진 만큼, 그 기간 동안은 평소와 다른 마음 가짐으로 불공을 하러 와야 합니다. 중요하게 서원할 일이 생긴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방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분정진입니다.

하루하루는 하루도 빠짐없이 다가오고 또 지나갑니다. 스물 네 시간마다 날짜가 늘 바 뀌니까 시간이 지남에 대하여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과 같고 오 늘도 내일과 같으며 내일도 어제와 같은, 비 슷한 날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 다. 하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제보 다는 오늘을 더 새롭게 보내고 더 나은 생각 과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각오와 계획 그리고 나아지는 모습으 로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그 하루하루들이 쌓 여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서 변화라는 것이 생깁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한 해가 바 뀐다는 것은 삼담히 큰 변화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때는 지난해에 이루지 못하였 던 것들을 돌이켜보고 반성도 하는 기회를 가 져야 합니다. 변화라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같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깊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한 발짝 더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변화시키는 일까지 시야를 넓게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 상에서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을 내지 않고,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는 일도 고려하여 어떠 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보존해나갈 수 있을 지 고민을 하고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이로 인 해 인생의 판국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화의 노력은 곧 수행이기에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수행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설계이자 지혜입니다.

수행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 습니다. 수행을 많이 할수록 수행자에게 수호 신이 많이 따른다고 합니다. 수행을 조금밖에 하지 않은 이는 수호신이 한 명뿐일 수도 있 고, 수행을 많이 닦은 사람은 무수한 수호신 을 거느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수행을 하고 있던 의상 스님에게 원효 스님이 놀러왔 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의상 스님은 문득 자신이 수행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를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스님, 좀 더 있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가시 지요?”

의상 스님이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수호신 들이 자신의 점심을 가지고 내려올 텐데, 등 장하는 수호신들로 하여금 자신의 수행성과 를 자랑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 다려도 점심은 오지 않았습니다. 배고픔을 이 기지 못하고 원효 스님은 돌아가기로 하였습 니다. 의상 스님으로서는 체면이 서지 않았으 나,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두 스님은 헤 어졌습니다. 원효 스님이 가자마자 하늘에서 수호신 하나가 점심을 들고 부리나케 내려왔 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옷 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 몰골이 말도 아니었 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의상 스님이 물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웨 수호신들이 갑자 기 너무나 많이 이곳에 몰려 있어서 그들을 비집고 오려다 보니 이렇게 옷이 다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 비집을 수가 없어서, 결국 이렇게 늦고 말았습니다.”

사연인즉슨 원효 스님을 따르는 수호신들 이 너무나 많아서 천공을 가로지르기도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의상 스님은 자신의 수행 이 더 많으리라 생각하고 과시를 하려 했지 만, 실은 원효 스님이 이룬 수행의 덕이 훨씬 많았답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면, 나의 공덕이 달라지고 또 공덕이 달라지기에 나 자신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보살님들 모두 불 공을 열심히 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세운 서원 들이 모두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지족한다는 것은,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공을 할 때에는 지나친 욕심이나 헛된 욕심을 자제하며 늘 감사한 마 음을 지녀야 합니다.

모든 요일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월요일은 보시, 화요일은 계를 지키는 날로 지계라고 합니다. 수요일은 참고 인내하는 날입니다. 목요일은 정진을 뜻하고, 금요일은 정려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려란 고요할 ‘정’에 생각할 ‘려’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함으로써 모든 번 뇌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끊임없 이 작용을 하고 있으며 어딘가에 얽매여 있습 니다.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봅 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간에, 산만하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산만한 마음 을 고요히 잠재울 수 있다면, 그 순간에 지혜 가 생겨납니다. 토요일은 지혜이며 일요일은 회향입니다. 회향이란, 회전 방향의 줄임말로 방향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업 을 수행으로 바꿔나가는 것이 회향입니다. 하 루에 한 가지씩 꾸준히 해나간다면 우리는 큰 공덕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나쁜 일이 닥쳐왔을 때 나쁜 일의 원인을 찾는 방법으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 람의 구별이 가능헙니다. 어리석은 이는 나쁜 일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는 반면,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언 제라도 어디에서라도 자기 자신을 봐야합니 다. 타인을 보면서 남의 탓을 한다면 오히려 고통이 배가 됩니다.

정진 중에는 악업을 짓지 말라고 하였습니 다. 악업을 짓지 않으면 행들은 자연스럽게 선행으로 이어질 것입 니다.

현교에서도 불공이라는 말을 씁니다. 현교 에서의 불공이란 부처님 전에 공양을 가져가 서 절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서원이 있어 간 절히 매달리며 하는 것은 기도라고 합니다. 이와 다르게 총지종에서 흔히 말하는 불공이 란 현교에서의 기도와 같습니다. 간절한 소망 으로 매진하는 것을 우리는 불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정성을 다해 야 합니다. 명심보감에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성이 가득하여야 하늘 이 감동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간절해야 부처 님도 감동을 하여 응답을 줄 수가 있습니다.

총지종 서원당에는 불상이 없기 때문에 부 처가 없는 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 다. 외관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이는 진실 이 아닙니다. 현교와 비교를 해볼까요? 현교 에서는 대행전에 불상을 모십니다. 이를 등상 불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과 모양을 비슷하게 만든 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어리

석기도 하여, 형상이 있어야만 부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불상 앞을 걸어 다닐 때 에도 진짜 부처님 앞에서 걷는 것처럼 뒤꿈치 를 들고 살금살금 걷습니다. 하지만 그 불상 은 진짜 부처가 아닙니다. 진짜 부처님은 눈 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부처님입니다. 불상은 그저 부처틀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입니다.

부처를 공경하기에 앞서 먼저 부처와 친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친근해 질 수 있 을 지 생각해봅시다. 먼저 가까이 지내야합니 다. 형식적으로라도 한달에 한 번이라도 절에 나와서 본전 앞으로 가 향도 피우고 합장도 해야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스승의 설법도 한 번 들어봐야 합니다. 또 집에 있는 경을 한 번도 들춰보지 않으면서 어찌 부처와 친근하 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각자의 형편이 다 르고 사정이 다를 수 있겠지만, 너무 오래 결 석은 하지 말고 자주 나오도록 노력해야 합니 다.

동참이란, 그 날 절에 나온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앉아 함께 같은 경을 읽고 상대의 불 공을 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패만 덜렁 걸어놓고, 일 년 내내 한번도 나오지 않고, 절 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을 대신 해달 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복이라는 것은 내가 지어야 하는 것이기 마련인데, 남한테 대신 지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짜를 바라는 것 이며 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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