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말과 생각, 그리고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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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34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9-05-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봉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봉래(BBS불교방송 보도국 선임기자)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2-11 17:30 조회 4,628회본문
“고유의 용어 지키는 일은 스스로의 정체성 지키는 일과 직결”
“용어의 뜻대로 여법하게 사는 일이 용어를 제대로 살리는 길”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고 사고를 표현하 는 도구라고 한다. 특히 논리적인 생각은 말로 이뤄지기 때문에 언어는 사상의 자유에 핵심 요 소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민족에게 고유의 말 을 빼앗고 쓰지 못하게 한 제국주의의 정책이 우연이 아니다. 외교권 박탈 같은 외적인 타격 에 덧붙여 언어 빼앗기는 보다 내적인 근본적인 타격이라 할 수 있다.
고유의 언어와 용어를 지키는 일은 종교 영역 에서도 정체성 지키기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 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부처님’이라는 용어 하나만 해도 불자들에게는 정체성과 귀의 처를 제공한다. 시대에 따라 부처님의 내포적 의미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근본에 있어서 는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한다.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수행에서도 언어가 중요하다. 간경•염불•염송 등 불교 수행 의 대부분이 말과 연관돼 있고, 십선업/십악업 에서는 4가지가 말과 관련될 정도로 말의 비중 이 크다. 선불교에서는 말을 여읜 경지를 강조 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말을 완전히 폐기한다기 보다 말에 걸리는 폐해를 차단하려는데 주된 목 적이 있다고할것이다.
그런데 소중한 불교 용어들을 하나씩 잃고 있 어 경각심이 요구된다. 최근에는 불교의 상징과 도 같은 ‘자비무적 (慈悲無敵)’의 자비란 말이 남 용되고 있다. 사랑을 앞세우던 종교에서 어느 새 ‘자비하신 하느님’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 다. 일찍이 창조주(God)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하늘을 숭상하던 우리 민족 정서와 가까운 하느 님/하나님으로 한 것이 교세 확장의 원인이 되 었다는 분석을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장로(長老)’와 ‘전도사(傳道®)’는 오래전에 빼앗긴 불교 용어이다. 연륜과 덕망이 많은 스 님들을 장로라고 하고 그런 분들의 말씀이 ‘장 로게’라 하여 전해온다. 또 부처님의 유명한 ‘전 도선언’에서 전도사의 어원을 발견할 수 있다. 특정한 맥락 속에서 생긴 용어가 그 맥락을 벗 어난 곳에서 쓰이다보니 지금은 아예 불교와 상관없는 용어처럼 치부되는 현실이다.
진리는 어떻게 불린다 해도 터럭 하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대자대비하 고 지고지순한 큰 사랑을 자비라고 부르든 사랑 이라고 부르든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실천이 중 요하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대상이라도 부르는 용어가 달라 지면 느낌이 다르게 다가 온다. 부처님의 경우 도 보통 우리의 생각이나 언어를 초월한 분이 라고 하지만 부처님을 가리키는 열 가지 명호 인 여래 십호는 부처님의 다양한 특성을 드러내 준다. 부처님의 덕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닮 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데 미묘한 차이가 있 다.
서로 다른 대상에 붙여진 이름이 같다면 혼동 을 준다. 똑같은 용어라도 맥락에 따라 그 내용 은 다를 수 있는데 용어가 같다보면 자칫 차별 성도 감춰지고 만다. 관세음보살 같은 불보살의 자비와 창조주의 자비가 어떻게 그 뜻이 부합할 수 있는가. 사랑을 베푸는 여락(與樂)의 자(慈) 와 아픔을 덜어내 주는 발고(拔苦)의 비 (悲)는 자타불이(自他不三)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창조 주와 피조물이 엄격히 구분되는 곳에서 그게 가 능한일인가.
인도에서 불교가 무너진 것은 고유한 특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힌두교가 불교 의 교리와 문화를 흡수해 버리니 불교는 독립적 인 위상을 잃고 소멸의 길을 걸었다는 이야기 다. 고유의 용어를 지켜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불교계는 불교의 보편타당한 진리로서의 보편 성을 바탕으로 그 위에 꽃피운 종교로서의 특수 성을 잘 가꿔 나가야 한다. 용어의 전쟁에서 패 하지 않고 용어의 뜻을 살리려면 무엇보다 용어 가 가리키는 뜻대로 여법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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