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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과 중도적 공동체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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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32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9-02-28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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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봉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봉래(불교방송 보도국 기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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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2-11 14:10 조회 3,5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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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과 중도적 공동체 윤리

“지금은 상호 의존의 측면 더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때”

“일(一)과다(多)의 융섭이라는 측면에서 사회 윤리 펼쳐야”



시내버스의 안내양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 진지 오래이다. 자동으로 잔금을 내주는 장치 가 부착되면서부터다. 운전만 하던 운전사 아 저씨는 일거리가 늘어난 반면 안내양들은 일자 리를 잃고 말았다. 상당수 안내양들은 더 힘들 고 어려운 일을 하게 됐다는 후문에 가슴 아파 해야 했던 기억이 있다.

19세기 산업혁명기에 벌어진 기계파괴 운동 은 인간이 편하고 싶어 만들어낸 기계가 도리 어 인간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으로 도 도한 문명 발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아예 ‘잉여인간’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면서 인간이 설 자리가 과거 어느 때보 다 좁아질 것이라는 전망에 위기감은 증폭되고 있다.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일부의 전망 도 있지만 하위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 들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엔 미흡하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 개인 과 사회 사이에서 공동체 윤리가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평등 이 없던 때는 없었고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들 이 뒤따랐다. 근대 사회가 발달하면서 개인의 중요성 뿐 아니라 개인 간, 또 개인과 사회 간 상호 의존의 측면도 부각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단순하게 보면 민주주의 내지 자본주의는 개인을, 사회주의 내지 전체주의는 공동체를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2차 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는 양측의 세대결로 점철됐다. 그에 실망 한 나라들이 비동맹의 기치를 내걸기도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기화로 소 비에트 연방까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치부됐고 마르크시즘은 폐기 대상으로 전락했다. 공동체라는 상호의존의 측면은 보통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지난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라 해서 곳 곳에서 토론의 장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별다른 반향은 적은 것 같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상 호 의존의 측면이 더욱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회적 동물’이 사는 곳에서 사회 윤리가 세련되게 실현되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사회적 고통은 증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는 자유방임에 맡겨서 도 안되고 개인 의사와 무관하게 이끌고 가려 해서도 안된다. 공동체를 무시한 지나친 개인 주의는 능력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을 근 본적으로 해소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개인의 창의성을 무시한 전체주의도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그렇다고 기계적인 균형도 어려운 만 큼 각 이념의 의의와 한계를 적절히 인식하고 활용하는 중도적 사고와 실천이 요구된다 하겠 다.

무엇이든 한 쪽에 기울어서는 부작용을 낳는 다. 인간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이라 는 두 가지 모습, 즉 일(一)과 다(多)의 융섭이 라는 측면에서 보다 진화된 사회 윤리를 정립 해나가야 한다.

불교계는 연중 각종 산림법회를 진행한다. 그 중 화엄산림에서 화엄은〈대방광불화엄경〉을 가리키고 산림은 ‘최절인아산 장양공덕림 (凶折人我山  長養功德林)’ 을 줄인 말이라고 한다. 즉 “나다 너다 하는 아상과 교만의 산을 무너뜨리 고 숲처럼 무성한 공덕을 가꾸라”는 뜻이다.

이러한 대승의 중도적인 윤리와 비슷한 맥락 의 정신이 우분트(Ubuntu)에도 있다. 반투족 말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 데,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혼자만 행 복해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느 한 편을 적 대시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함께 하는 불가분적 인 관계의 장을 실현하려 노력할 때 공동체의 건강성은 배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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