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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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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36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9-07-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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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법경 필자소속 법천사 필자호칭 주교 필자정보 법경 정사 (밀교연구소장/법천사 주교/ 철학박사)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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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2-11 20:26 조회 3,7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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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밀교문화와 생활 (29회)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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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경 정사 (밀교연구소장/법천사 주교/ 철학박사)


쟁심 (評心)


『대일경』에서 중생의 60가지 마음 가 운데 열세 번째로 설하고 있는 마음이 쟁심(詳心)이다. 쟁심(詳心)은 자기 마 음 안에서 옳고 그름을 다투는 마음이 다. 앞에서 설했던 투심 (H心)과 비슷하 나 투심 (패心) 은 다른 사람과 옳고 그름 을 가리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쟁심 (詳心)은 자기 마음 가운데 스스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말한다. 즉 투심은 타인과 관계가 있고, 쟁심은 자신의 문 제다.

대일경소』에서 쟁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이른바 안으로 옳고 그른 마음을 품고 스스루 하나의 뜻을 생각해내고서 는 문득 스스루 반대 의견을 내어 다시 그 잘못을 가리거나 또는 좋은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자문을 받았더라도 다 시 생각해서 득실을 따져 ‘이 일은 이래 야 한다.’ ‘이것은 합당하지 않다.’ 고 말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모습이 많이 나타나면 이것이 다투는 마음임을 알아야한다.”고하였다.

말하자면 자기 마음속의 갈등을 말하 는 것인데, 득실을 따지고 이해타산을 생각하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중생의 마음이란 만생만멸(萬生萬滅) 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온갖 생각을 일으키고 분별을 일삼으며 탐진 치 삼독심으로 번뇌를 일으킨다. 만 가 지 생각이 일어났다가 만 가지 생각이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쟁심이 가득하다.

이와 달리 자기 마음 안에서 옳고 그 름을 다투는 마음이 없는 것을 무쟁심 (無詳心)이라 한다.



무쟁심 (無評心)


무쟁심은 옳고 그름을 함께 버리는 것 이다.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이다.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고집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마음은 자기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합당한 것이라면 고집을 버리고 언제든지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마음이다.

「대일경소』에서 무쟁심을 이렇게 설 하고 있다. “이치에 합당한 것을 들으면 곧 이것을 받아 행하는 것이오 혹은 먼 저 옳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릇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곧 이 것을 고치는 것이다. 정(情)에 집착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함께 버린다. 이와 같은 모습이 많으면, 이것을 자기 마음 안에 다툼이 없는 마음이라고 한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합당한 것 이라면 자기 고집을 버리고 스스로 수 정하는 마음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고집이 강하여 무리하게 일을 처리하 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자기 논리 와 대의명분에 빠진 경우다. 이를 극복 하기 위해서는 경청과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자 신의 생각과 마음상태를 객관적으로 들 여다보는 것이다. 이를 ‘마음에 대한 관 찰(觀察)다른 말로 ‘마음챙김’ ‘알아차 림’이라고 한다. 즉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에 대한 이해와 자각이다. 이를 지혜라고 한다. 따라서 지혜 있는 마음이 바로 무쟁심 (無詳心)이다.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다툼이 없는 마음을 알아채고, 모든 법 의 실상을 알아서 다툼이 없는 마음을 닦는 것이 쟁심을 다스리는 길이다.”

지혜를 닦아야 하는 이유다. 지혜를 밀교에서는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 라고 부른다. 여실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그 실상을 아는 것이 지혜다.

 


천심 (天心)


그러나 중생은 높은 뜻보다 낮은 것에 더 큰 뜻을 두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세간적 성취라고 말한다. 물론 밀교에 서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중요시 하지 만 낮은 차원의 개인의 서원성취도 방 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방편을 무시하거나 등한시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세간적 성취를 바라는 중생의 마 음을 천심 (天心)이라고 한다. 여기서 천 심은 하늘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 다. 밀교에서 말하는 천심은 하늘에 태 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즉 생천설 (生天說)에 기인한 말이다. 고대로부터 인도에서는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생천사상이 만연해 있었다. 생 천은 사람들이 바라는 소원 가운데 가 장 큰 소원이었다. 이와 같이 소원성취 를 바라는 중생의 마음을 천심 (天心)이 라한다.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천심 (天心)이라 하는가? 염원에 따라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소원성취 를 바라는 천심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 인가. ‘나쁘다’ ‘좋다’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천심은 중생 의 마음인 것이 명확한 사실이지만 여 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대일경소』에서는 “진언을 수 행하는 사람이 둥글고 큰 과(果)를 기약 하지 않고, 다만 자기 마음을 위해서만 끌어당긴다면 정보리심(淨善提心')이 아니다. 세간의 성취를 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큰 서원 보다 개인적인 서 원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개 인의 서원에 집착하는 것은 중생의 천 심 (天心)이지만 원대한 서원을 세우는 것은 천심(天心)을 뛰어넘는 것이다. 따 라서 개인의 서원을 세우더라도 더 큰 서원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7월 15일이면 하반기 49일 진호국가 불공을 마치게 된다. 이 불공이 바로 천 심을 뛰어넘는 대서원의 불공이다. 옴 훔야호사. 옴훔야호사. 옴훔야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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