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과 마냥, 기다려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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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1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9-12-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역삼한담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정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시인 김정수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1 04:28 조회 5,399회본문
사춘기 아이들의 특징이 ‘짜증’과 ‘허세’라고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애들이 왜 걸핏하면 짜증을 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부모가 죄’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다. 사춘기 때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성인 수준으로 발달하지만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은 상대적으로 발달이 더디다. 이 차이가 가장 큰 시기가 바로 사춘기다. 순간순간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는 등 감정의 기복이 ‘죽 끓듯’한데 스스루 조절이 안 된다. 몸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자신감도 쑥쑥 올라가지만 마음의 성숙이나 성적 등이 이를 받쳐주질 못해 자신감이 떨어진다. 아이들은 그 격차를 ‘허세’로 채운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하며 큰소리치지만 실상은 허세다. 짜증에 지쳐, 허세를 진짜로 믿고 마냥 기다려준 결과는 원망으로 돌아온다. “왜 그때 나를 잡아주지 않았어. 왜 그냥 내버려뒀어”라는. ‘그냥’과 ‘마냥’을 믿고 기다려주던 부모는 ‘황당’과 ‘황망’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수능 포기하면 안 돼요?” 수능일 아침, ‘멘붕’에 빠졌다. 그 말을 하기 훨씬 전부터 아이는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에 떨어졌을 텐데,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좀 더 일찍 사태를 파악하고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후회막급이다. 충격도 잠시, ‘욱’한 감정을 누르고 어르고 달래 수능만은 보라고 설득한다. 짜증에서 허세로, 다시 허세에서 짜증으로 전환됐을 때 ‘마냥’이 아닌 약간의 ‘강제’가 개입했어야 한다.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부모는 그 시기를 놓치고서야 후회한다. 엇나가지 않았으니 됐다고, 공부가 다가 아니라고 자위해 보지만 세상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부모나 아이가 서로 착각하는 것이 있다. 부모가 되면 무엇이든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부모는 다 해줄 뿐 아니라 완벽하다는 것. 아니다. 부모도 아이처럼 초짜다. 대학 2학년 딸과 고3 아들을 키워보는 건 처음이다. 딸의 고3을 겪어봤어도 그건 딸의 입시일 뿐 이다. 딸과 아들은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오죽했으면 금성에서 온 여자, 화성에 온 남자라 했겠는가. 딸의 입시를 겪었으니 좀 더 수월하게 아들의 입시를 치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착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의 삶을 산다. 결혼을 몇 번 해도, 애를 아무리 많이 낳아도 그 결혼과 아이는 별개인 것이다. 겪어봤으니 좀 더 수월한 것이지 그 삶이 그 삶은 아니다. 경험을 ‘모든’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사춘기 아이를 기다려줘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마냥은 아닌 것 같다. 무언가 약속을 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필요하다. “나, 학원 안 다니고 스스루 공부할래.” 이 고마운 말의 함정은 허세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하겠다는 자신감과 학원에 다니기 싫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는 것. 이때 단호하게 허세를 꺾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 지금은 학원을 끊지만 여름방학 후부터 다시 다니도록 하자” 하면서 아이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동시에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아이는 스스로 학원을 그만두었기에 “나 다시 학원에 다닐래요.”라는 말을 잘 못한다. 부모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데 ‘스스로 학원을 그만두었으니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겠지’ 하며 마냥 기다린다. 그러다가 방치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때는 아이도, 부모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해진다.
요즘은 “내가 왕년에…”는 아니더라도 “내가 공부할 때는…” 말만 꺼내도 ‘꼰대’가 된다. 하지만 꼰대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누가 공부하라 하지 않아도 스스루 알아서 공부한 경험. 늦게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간 꼰대는 자꾸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려 한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꼰대의 훈계나 잔소리보다 대안을 찾는 일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아이를 꼭 안아주며 “곁에 잊어줘 고맙다”는 말과 가족의 사랑,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일이다.
<시인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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