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진언 염송, 번뇌망상 다스리는 지름길

페이지 정보

호수 29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7-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7-08 13:33 조회 571회

본문

진언 염송, 번뇌망상 다스리는 지름길

8. 다라니(陀羅尼) 지송공덕(持誦功德)


◌ 진언(眞言)

 진언(眞言)에는 오부(五部)가 있다. 불부주(佛部呪), 연화부주(蓮華部呪), 금강부주(金剛部呪-금강신金剛身), 보부주(寶部呪-제천諸天), 갈마부주(羯磨部呪-제신주諸神呪).

오부진언(五部眞言) 오부단법(五部壇法) 각각(各各) 다섯이 있으므로 모두 이십오부(二十五部)니라. 각각 그 인(印)이 있다.


◌ 공덕(功德)

1) 불보살의 진실한말 무형한 법계의 진리를 총집약한 것이 진언이다. 그러므로 정신환자가 그 뜻을 모르고 염송해도 공덕은 그대로 난다.

2) 염송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하는 것과 싫어서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3) 희사를 겸하면 공덕은 더 바르다.

4) 현실 물질에도 정수(精髓)라는 것이 있듯이 법계의 진리에도 불보살의 본심과 본서(本誓)에도 그 정수가 있는 것이 유형무형의 상대원리일 것이다.


註 - 진언(眞言), 다라니(陀羅尼), 주(呪)에 대한 소고(小考)

 기원(起源)을 소급하여 보면 고대인도(古代印度)에서 쓰여졌던 것인데 각각 그 기원을 달리하고 있고 뜻도 다르게 쓰여졌다. 이것이 근자(近者)에 와서는 일반적(一般的)으로 동일(同一)한 뜻으로 쓰여지기도 한다. 다만 상이점(相異點)이라고 하면 길이가 긴 주(呪)는 다라니(陀羅尼)라 하고 중간 길이의 것은 진언(眞言), 아주 짧은 것은 주(呪)라고 하는 구별(區別)이 있을 따름이다. 예시하면「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아미타여래근본다라니(阿彌陀如來根本茶羅尼)」와 같은 다라니는 꾀 긴 주(呪)이고 제불(諸佛), 보살(菩薩), 명왕(明王) 등의 진언은 길이가 보통이고 주(呪)는 아주 짧은 것인데 ‘훔’ ‘옴남’ ‘옴치림’ 등을 들 수 있다.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音譯)으로 그 뜻은 무엇을 보지(保持)한다. 또는 ‘지(持)’ ‘총지(摠持)’라고 번역(飜譯)하고 있다.


 진언(眞言)은 범어(梵語) 만트라(曼陀羅-MANTRA)인데 밀어(密語), 명(明), 주(呪), 여어(如語), 진실어(眞實語)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진실(眞實)한 말씀’ 또는 ‘신성(神聖)한 말씀’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진언은 진실하고 허망(虛妄)이 없는 ’여래(如來)의 언어(言語)‘ ’불타(佛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언밀교(眞言密敎)라고 하는 것은 ’불타(佛陀)의 진실(眞實)한 말씀에 의(依)하여 조직(組織)된 종교(宗敎)‘ ’불타의 진실한 말씀에 의하여 건설(建設)된 종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호지국가 안락인민 보성다라니경』, 『제신심병증장 복혜 성 육자다라니경』, 『불공견색신주심경』, 『현겁경』의 경전 인용 부분은 생략하였습니다.

   경전을 독송하는 의미를 곱씹어보게 하는 부처님 당시 일화가 있다. 몇몇 수행자들이 숲에서 수행을 시작했는데 그 곳에 살고 있던 나무신들은 그것이 못마땅해 스님들을 내쫓기로 했다.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나 놀래키고 끔찍한 소리와 지독한 악취를 풍겨 괴롭혔다. 수행에 집중할 수 없었던 스님들이 숲에서 나와 다른 수행처를 찾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 곳으로 가 『자비경』을 외우라 했다. 그러자 나무신의 괴롭힘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나무신을 비롯한 숲의 정령들은 부처님을 찬탄하고 기쁜 마음으로 스님들을 도왔다고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행복하라.’ 수행의 밑바탕에는 뭇 생명을 향한 자비와 축복의 마음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기도야말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주문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일념염불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즉심시불’, 이 네 글자를 일념으로 외우면 큰 공덕이 있다는 법문을 들은 귀 어둡고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즉심시불, 직심시불, 되뇌었지만 얼마 못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스님이 말씀하신 네 글자가 무엇이던가, 몇날며칠 고심하다가 어느 날 댓돌에 놓여있는 짚신을 보고는 확신에 차서 ‘짚세기불’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앉으나 서나 지극한 마음으로 짚세기불을 염해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외우는 것이 무엇이든, 뜻을 얼마나 알고 있든, 중요한 건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다라와 만트라는 밀교를 대표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진리의 법계와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형상과 소리로 구현한 것이다. 다라니, 진언, 주는 모두 진실하고 신성한 부처님 말씀, 모든 지혜와 삼매를 축약하고 호지하는 부처님 말씀이라는 뜻이니,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선법을 지니게 하여 악을 없애고 재난을 막아주는 그 신비한 힘은 스스로의 정성과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밀교행자는 삼밀수행을 기본으로 삼는다. 부처님의 삼밀과 나의 삼밀이 하나 되도록 몸으로 결인을 맺고 입으로 진언을 외우며 마음으로 부처님을 새기고 기억한다. 업은 의도와 행위가 쌓인 것이니 마음부터 바르게 먹어야 한다. 그리고 오계를 지켜 바른 행위를 닦아야 한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음주는 몸으로 짓는 업을 경계하고 불망어는 입으로 짓는 업을 경계한다. 망어에는 거짓말, 속이고 꾸미는 말, 이간질 하는 말, 거칠고 악한 말 등이 있다. 


   구업을 조심하라는 부처님 말씀은 차고 넘친다. 사람은 저마다 입 안에 도끼를 지니고 있다 했고, 입은 복과 화가 드나드는 문이라 했다. 말의 무게는 헤아릴 수 없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의 결과는 천지차이다.  

   우리가 평소 하는 말 가운데 가장 쓸 데 없는 것이 ‘남 얘기’, ‘연예인 얘기’다. 유명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사생활과 신변잡기야말로 너무 가볍고 하등 쓸모가 없어 뒷맛이 씁쓸하고 허탈했던 적, 누구나 있을 것이다.

   ‘뒷담화’ 역시 문제다. 사는 게 힘들고, 참고 지내야 하는 처지에 있을수록, 신세한탄과 하소연으로 견뎌야 하는 팍팍한 현실을 이해하지만 지나치면 볼썽사납다.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리거나 감추기 쉽고 차츰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아주 안 좋은 습으로 굳어진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담이 아니라면 침묵하라고 말씀하셨다. 고요한 사유와 깊은 침묵으로 마음의 샘물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은 명언이다. 우리의 마음은 가만히 놔두면 끝 간 데 없이 내달리며 망상을 피운다. 실오라기 같은 자그마한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온갖 곳으로 흩어지고 부풀어 오르는 번뇌 망상을 잠재우는 데는 염불 염송만한 것이 없다. 그 아름다운 말씀을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새기면 몸도 마음도 청량해지고 정갈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티베트에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배우는 말이 ‘옴마니반메훔’이라고 한다. 그들이 평생 가장 많이 외우고 가장 많이 듣는 단어이기도 하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 마치 향에 물들어 몸에 자연스레 향기가 나는 향광장엄 같다고 했다. 입 안을 부처님의 이름과 참된 말씀으로 채우는 이에게 빛과 향기가 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구업을 참회하는 길, 거칠고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말로 대신하는 길, 진언 염송만한 것이 없으리라. 아직 수행력이 깊지 못하여 평소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을 나만의 진언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처님께서 주신 진실하고 신성한 말씀을 염송하여 불보살님과 진언과 내가 흐트러짐 없이 하나 되는 가피와 감응의 순간을 꿈꿔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