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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세계는 인연因緣과 감인堪忍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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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8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7-01 신문면수 6-7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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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7-10 13:18 조회 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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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세계는 인연因緣과 감인堪忍의 세계

회잡(會雜)의 세계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과 불행을 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자신에게 고통과 불행이 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이 오면 토정비결을 보고, 신수를 보고, 삼재풀이를 하는 등 별별 액막이를 하느라 부산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심지어 부처님의 도량에까지 와서 일 년 신수를 보아 달라고 하는가 하면, 길흉화복을 묻고, 혹여 그런 것은 정법이 아니라고 설명하면 오히려 그런 것도 볼 줄 모르는 무능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인생에 있어 안락과 행복은 중요한 것이며, 고통과 불행은 멀리 여의고 싶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바세계입니다. 사바세계는 상대적인 가치로 얽히고설켜 있는 회잡(會雜)의 세계요,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감인(堪忍)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일생 갖가지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 하며, 고난을 극복하고 참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사바세계 중생의 숙명입니다. 업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중생은 자기 의지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업보에 의해 이끌려 나왔기 때문에, 마치 갖가지 잡된 인연의 그물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아서 마음대로, 뜻대로 자유롭게 살 수 없습니다.


번뇌는 팔만사천


중생은 모두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으며, 윤회의 그물에 걸려 있는 고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사바세계는 고통과 불행이 언제 닥쳐올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이 사바세계를 고해(苦海)라고 하시고 중생계에 태어난 모두가 피하려고 몸부림쳐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여덟 가지 근본 고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과 같은 큰 괴로움이 있으며, 그밖에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고 원한을 품은 것과 만나야 하는 고통,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괴로움이 어찌 이 네 가지, 여덟 가지만 있겠습니까? 중생의 번뇌가 팔만사천 가지라면 괴로움도 팔만사천 가지입니다. 팔만사천이라는 숫자는 ‘한량없이 많다’라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중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살이에는 뜻하지 않은 재난 또한 많습니다. 흔히 팔난(八難)이라 일컫는 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화재, 수해, 태풍, 전쟁이 쉴 사이 없이 침노합니다.


고난을 친구처럼···


하지만 중생은 이러한 고난을 싫어합니다. 나에게만은 고난이 닥쳐오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피해 가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러한 재난이 닥쳐왔을 때 우리는 경악하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비탄에 젖거나, 세상을 원망하게 되는데,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고난과 시련이 닥쳐왔을 때, 피하고 달아난다고 하여 그 고난과 시련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바세계에서 사는 한 고난을 친구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피하고 달아날수록 고난과 시련은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누구에게나 고난과 시련이 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의지해야 일어날 수 있듯이, 고난과 시련을 겪는 사람은 그것을 의지처로 삼거나 디딤돌로 삼아야 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찬란하듯이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영광과 승리는 더욱 값지고 빛납니다.


영광 뒤 고난을 보아야


창밖의 푸른 잎은 지난겨울 춥고 어두웠던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결과로 저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우리 앞에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대개 고난과 시련의 시간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 뒤에 있는 고난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고난과 시련을 겪은 뒤에 찾아오는 영광과 성공을 위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땀 흘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농부는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성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도둑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성공한 사람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도전의 기회이자 영광의 디딤돌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국왕의 지위를 버리고, 나라를 버리고, 사랑하는 처자를 버리고,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난행과 고행을 하신 후에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훈련은 참회와 수행


고난과 시련이 닥쳐왔을 때 우리는 ‘나’라고 하는 소아에 집착하기 전에 세상 이치를 관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 살펴보는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평소에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은 다름 아닌 수행입니다. 수행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우선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참회가 있어야 합니다. 재난이 닥치면 보편적으로 자신의 허물을 살피기에 앞서 세상을 원망하거나, 남 때문이라는 생각하거나, 재수를 탓하거나, 팔자타령이나 신세 한탄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사실 괴롭다, 고통스럽다, 행복하다, 안락하다 등등 많은 개념이 있지만 이러한 개념은 ‘나’라고 하는 주체가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나, 나 자신이라고 하는 실체로서의 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장 ‘무슨 말을 하느냐, 이렇게 멀쩡하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내가 없기는! 무슨 소리냐?’라고 항의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사실 고정불변하는 나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자신을 바로 보라’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므로 한 번도 같은 존재란 없습니다. 또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 의지하는 상관관계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고정불변하는 나라는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아무리 튼튼하다고 해도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의해 마침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나의 정신 또한 한 생각 일어나서 잠시 머물다가 바뀌어 사라져 버리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흐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나’를 구성하는 육체와 정신 모두 끊임없이 변하다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에 불과하므로 무아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가 본래 없는데 그밖에 개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말 봄날의 아지랑처럼 허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상과 무아를 통해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도인에게 행복이니 불행이니 권력이니 명예니 고통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말 따위는 그대로 잠꼬대입니다.


문제는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시비와 병통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자신을 바로 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가짐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고난을 행복으로, 시련을 성공으로 바꾸는 것도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겸허해야 합니다. 삶의 진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눈앞에 있거나 발아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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