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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바루기 | 마야(māy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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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5-27 16:21 조회1,4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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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māyā)는 산스크리트어로 환영(幻影)’, ‘속임수’ ‘외관(外觀)’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 마야라는 환영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마야는 그러한 덧없음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공즉시색의 논리로 보면 덧없는 현상과 실재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공이라는 실재에 즉하지 못하고 형체나 개념에 동결되거나 경직되어 있는 생성된 사물로써의 마야(māyā)는 덧없는 환영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관계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 속에만 국한되어 있다. 환영적인 자아성을 유지하고 유지하려는 깨닫지 못한 인간의 개별성·육체성은 이 부정적인 뜻에서 마야이다.

 

이런 부정적 마야 즉 환영에 머물게 되면, 일체의 형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정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의 육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은 덧없는 변화뿐이다. 부처의 눈만이 변환의 불변성을 볼 수 있다. 변환은 정신이 활동하는 형태이며 생명 그 자체다.

 

만약 법신의 의식에서 볼 수 있다면 모든 고립적인 외관적 형체는 환영이지만,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 환영은 실재의 창조적인 상이다. 여기서 마야는 환영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전체로서 즉 그 연속성, 창조적 기능에 있어 즉 변환과 보편적 관계의 무한한 힘으로서 볼 수 있는 한에서는 환영 그 자체는 아니다.

 

현상계의 환영적인 외관의 형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마야의 힘이지만 마야 자체는 환영이 아닌 것이다. 이 힘을 터득한 자는 손아귀에서 해탈의 수단을 얻고, 요가의 주력(呪力)을 얻으며, 창조, 변환, 재통합의 힘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 창조의 어떤 것에 머물러서 그것을 자기 한정적 존재 상태로 한정하려고 하자마자, 그림자를 실체로 부분적인 상을 궁극적인 실재로 순간적인 것을 그 자신에게 존재하는 무엇인가로 파악함으로써 곧 환영의 먹이가 된다.

 

불보살의 신체(kāya) 또한 부정적인 의미의 마야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환영으로부터 해방되어 한정되지 않고 더 이상 ()’에게 속박되지 않는 마음의 의식적 창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