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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 가장 소중한 시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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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11-15 11:35 조회2,1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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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톡방에 친구가 친정엄마를 모시고 여동생과 함께 23일 가을 나들이를 간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러자 멋지다느니, 부럽다느니, 잘 다녀오라느니, 좋은 추억 많이 만들라느니 하는 친구들의 응원 댓글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환호와 찬사가 뜨거워질수록 우리의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고향 친구인 우리는 저마다 친정엄마 이야기를 했다. 나처럼 오래전에 엄마가 돌아가신 친구가 태반이고, 엄마와의 여행에 설레는 그 친구처럼 엄마가 살아 계시기도 하지만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서로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주거니 받거니 오래도록 웃다가 울다가 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곁에 계신다 해도 병약해진 엄마를, 더군다나 다른 세상을 살고 계신 엄마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친구가 부러웠다. 사랑이 가득 담긴 눈, 따뜻한 품, ~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손을 마주 잡고 엄마의 걸음에 맞춰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곳을 함께 바라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엄마 곁에 나란히 누워 꽃보다 더 예뻤던 엄마의 젊은 시절을, 엄마의 치맛자락을 휘감고 맴돌던 철부지 어린 시절을 함께 더듬어 보는 그 시간은 순간순간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할까. 어느 것 하나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 그 부러움은 후회가 되어 슬픔으로 마음을 적신다.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하게 된 건 아주 뒤늦게, 엄마가 혈관성 치매로 기억의 끈을 놓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엄마가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치의는 재 출혈의 우려 때문에 두어 시간 비행기를 타는 일은 무리라며 제주도 여행 정도를 권했다. 엄마의 해외여행은 남의 나라가 아닌 제주도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나는 입이 마르고 닳도록 해외여행 타령을 하면서 엄마의 새 옷과 모자와 선글라스를 사고, 여행 기분이 물씬 나도록 큼지막한 캐리어도 꾸렸다. 김포공항까지 동행한 동생 내외의 환송을 받으며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던 그날, 엄마는 해외여행의 벅찬 감동에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손을 잡고 가볍게 걷는 게 고작이었지만 곳곳에 즐비한 야자수를 보고 신기해하던, 까만 털이 비치는 흑돼지 삼겹살에 손사래를 치던, 귤을 따다가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고 시무룩해 하던, 누구누구에게 오메기떡을 사다 주자며 손가락을 꼽던, 기념사진을 찍으며 수줍게 웃던. 많은 기억이 사라진 엄마에게 제주도는 오래전에 다녀간 곳이 아니라 난생처음 발 디딘 해외 여행지였다.

 

친정엄마가 치매를 앓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였다. 그 후 5년을 더 사셨지만 엄마 인생의 마지막 3년은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돌아가시기 전 1년 남짓 한 시간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망가져 가는 엄마와의 하루하루는 끝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전쟁과도 같은 절망의 나날이었다.

 

힘들었다.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한없이 가엾기만 했던 엄마가 버거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마를 영영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피폐해져 가는 자신을 견디기 어려웠고, 내 안에 쌓이는 원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착한 딸도, 희생적인 딸도 아니었다. 치매를 앓는 노모와 동반자살을 한 아들의 이야기를 곱씹고 되뇌며, 최악의 것이었을지언정 그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엄마, 우리도 함께 죽을까? 너무 힘들어서, 정말로 너무 힘들어서 나 혼자라도 죽고 싶은데, 그러면 동생들이나 올케들이 또 힘들어지잖아. 그러니까 엄마랑 나랑 같이 죽자. 엄마 혼자는 무서울 테니까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

 

부끄러운 고백이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잠든 엄마의 머리맡에서 얼마나 여러 번, 얼마나 간절하게 되뇌었는지 모른다. 절망감에 몸부림치며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했다. 엄마가 준 사랑보다 당장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무게가 내게는 더 크고 무거웠으므로. 희미한 빛조차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늪에 빠져 끝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으므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더니 극으로 치닫는 딸의 모난 성정을 아셨는지 오래지 않아 엄마는 아무런 조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주무시는 것처럼 세상을 뜨셨다. 아주 가끔이지만, 정신이 맑아질 때면 예전의 유순한 얼굴로 불쌍한 우리 딸, 미안해. 고생시켜서 미안해.” 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우리 엄마.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때늦은 후회로 가슴이 무너진다.

 

친구가 친정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간다는 말에 이렇듯 수많은 회한이 밀려드는 걸 보니 아, 이제야 알겠다. 늙고 병든 엄마의 좁은 어깨가 지난한 나의 삶을 버티게 해 준 힘이었고, 지친 나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내 연민에 싸여 내 고통만 바라보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엄마의 시간이 그렇게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것을.

 

단톡방에 슬쩍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열 번째 가르침,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을 띄운다. 자식을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어버이의 은혜를 깨우쳐 주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매운 회초리가 되어 가슴에 사무쳐 오는 밤, 그립고 또 그리운 엄마께 참회의 기도를 바친다.

 

어버이의 큰 은혜 깊고도 중하여라.

깊은 사랑 잠시라도 끊일 사이 없으니

앉으나 서나 그 마음이 따라가서

멀든지 가깝든지 늘 자식과 함께 있네.

어버이 나이 많아 백 살이 되었어도

여든 된 아들딸을 쉬지 않고 걱정하네.

이같이 큰 사랑 어느 때에 끝날까.

수명이 다하면 그때에나 떠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