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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뜨락 | 부처님의 장애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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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7-06 22:52 조회2,2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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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장애인 사랑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시각장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는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나율이다. 아나율(阿那律:Aniruddha)은 카필라성 출신으로 곡반왕의 아들이다. 부처님께서 아나율이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했는데(終止符:종지부) 천안이란 멀고 가까움, 안과 밖, 낮과 밤을 불문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또 아주 미세한 물질도 능히 보고, 시간을 초월하여 중생들의 내세에 관한 것도 알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아나율이 이런 천안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실명으로 인해서였다. 그런데 아나율이 실명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어느 날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아나율이 깜빡 잠이 들었다. 그것을 본 부처님은 아나율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가?’라고 묻자 그 뜻을 알아채고 아나율은 지금부터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겠습니다.’라는 맹세를 하고 불면(不眠)으로 정진했다. 그러다 아나율의 눈에 병이 났다. 부처님께서는 치료를 받도록 권했지만 아나율은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정진을 했기에 완전히 실명해 버렸다. 그러니까 실명은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지 전생의 업 때문에 빛을 잃은 것은 아니다. 아나율은 실명으로 천안을 얻었기 때문에 실명은 빛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 눈이 할 수 없는 인식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부처님께서도 실명을 한 제자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아나율은 앞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늘귀를 꿰기가 몹시 힘들었는데, 부처님께서 아나율을 위해 바늘귀를 뀌워주셨다(增一阿含經:증일아함경).

부처님의 원력으로 아나율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 아니라 앞을 볼 수 없는 아나율을 위해 바늘귀를 뀌워주는 현실적인 지원으로 인간적인 사랑을 실천하였다. 장애인을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포용적인 모습이다.

 

불교장애인복지 단체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장애인복지시설을 운영하기가 너무 힘들다며 장애인복지는 아무나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특별한 욕구가 있는 그룹이고, 장애는 경험할 수도 없으며 이론으로 공부한다고 하여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서 장애인복지 운영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장애인 당사자이며 불자인 필자로서는 그 어느 쪽 편에 설 수 없지만 부처님이 아나율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떠올려보면 불교장애인복지 종사자들이 어떤 자세로 장애인을 대해야 할지 깨닫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아냐율이 앞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시지 않고, 아나율이 마음의 눈을 떴다며 세상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갖게 되었다고 대중 앞에서 아나율의 실명이 불행이 아니고 새로운 능력임을 밝히셨다. 부처님 살아계실 그 당시에도 시각장애인이 있었다. 대중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이라서 멀리하거나 얕보며 멸시하였지만 경전 곳곳에서 시각장애인을 보면 손을 내주어 잡게 하고, 지팡이를 만들어주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어 그들이 장애로 인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장애인복지를 몸소 실천하셨다. 부처님을 마음에 모시고 불법을 실천하고 있는 불자들이 장애인을 위해 시설이나 단체를 운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교복지는 일반 장애인복지와 달라야 한다. 사회복지는 시스템으로 운영이 되지만 불교복지는 불법의 실천이어서 장애인을 서비스 대상자로 볼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한 몸처럼 느끼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필요하다. 그래야 불교장애인복지는 확실히 일반복지와 다르다는 평가로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