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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하지 않는 자비(慈悲) 애타(愛他)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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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심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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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법선 정사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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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2-11 13:37 조회 1,1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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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하지 않는 자비(慈悲) 애타(愛他)의 삶

말나식은 제6의식의 심층에서 활동하면서 자아를 집착하는 마음이다. 우리들이 시작 없는 옛날부터 집요하게 자아를 집착하여 온 것은 말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나식의 이러한 근원적이며 염오적 활동은 안식에서 의식에 이르는 표층의 심식을 오염시킨다. 그 결과 제6의식에 의한 인식은 무기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자아의식이 동반된 분별이기 때문에 항상 집착의 양상을 띤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항상 활동하는 말나식의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 한 자아에 대한 근원적인 집착심으로부터 해방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 대한 집착이나 자기가 아닌 것과의 끊임없는 대립은 밑바닥에 잠재적인 자아 집착심, 즉 말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6의식의 저변에 있는 자아의식을 소멸하지 않는 한 결코 집착이나 대립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5식으로부터 제6의식으로 받아들여진 정보는 일단 말나식의 아()라는 사고를 거쳐서 나오기 때문에 아()의 색깔이 칠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 고친 정보는 밑바닥의 아뢰야식에 훈습하여 저장되는 것이다.

 

말나식을 가장 말나식답게 특징지우는 심소는 다섯 가지이다. 즉 아치아견아만아애의 4번뇌와 혜를 말한다. 이 네 가지 번뇌는 자기의 실상을 가리는 무지이기 때문에 자아를 그릇 인식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게 구는 탐탁치 않은 마음이다. 아치는 자기의 참된 실태를 알지 못하는 무지이다. 인간의 자아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무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자기의 진상을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기의 견식을 고집하게 되고, 자기 위주의 주장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며, 겸손하게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아견이 생기게 되며, 남에게 교만하거나 거만해지는 아만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를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기가 마음대로 만들어 낸 허상의 자아상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아애가 생긴다. 우리 인간은 자기의 진상에 대한 깊은 자각도 없이 자기 혼자만의 뜬 생각에 사로잡혀 교만하게 주위를 변화시킨다. 예를 들면 언제나 자기를 내세워 대항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대항을 하며, 자신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기임도 불구하고 상대와 자기를 비교하여 뽐내기도 한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사고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와 남을 분명하게 골라서 분별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것은 자기의 일’ ‘이것은 남의 일’ ‘이것은 이익이 되는 것’ ‘이것은 이익이 안 되는 것’ ‘이것은 지금은 손해이지만 앞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해 두는 것이 좋은 일’ ‘이것은 끝에 가서는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만 두는 것이 좋은 일등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기와 남을 분명히 갈라놓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골라서 계산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잣대로써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없고 매우 편파적인 것이 되고 만다.

 

말나식이 인식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대상으로 한다. 말나식은 자기 이외의 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 다만 자기에게만 집중할 뿐이다. 말나식이 자아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은 개념이나 이론을 초월하여 선천적이고 본능적으로 집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기라는 실체가 실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나식의 인식대상인 아뢰야식은 폭포수와 같이 잠시도 멈추는 일이 없으며, 끊임없이 흐르는 폭포수가 바로 자기인 것이다. 그런데 말나식은 끊임없이 흐르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말나식은 폭포수 같은 자기의 진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상주불변하는 자아상을 만들어 내며, 그 허상에 애착을 품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또한 말나식은 수행에 의하여 무아의 진리와 존재의 평등성을 각성하게 될 때 자기에게만 치우쳤던 눈이 완전히 바뀌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눈이 열리게 된다. 이기성이 자애로 변하는 것이다. 이기심이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한 것이다. 수행이 원만해 지면 이기적인 자아애는 사라지고 맑고 깨끗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불보살이 우리들과 다른 점은 말나식의 차이에 있다. 즉 우리 범부들은 자신에게 집착된 삶을 살고, 불보살은 자비애타(慈悲愛他)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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