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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뒨둡 초대 달라이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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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4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1-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정성준 교수의 밀교 인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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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교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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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1-05 15:08 조회 1,55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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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뒨둡 초대 달라이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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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달라이라마 겐뒨둡


한국불교에서 티베트불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망명 티베트의 정치사회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 14세 텐진갸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의 역사를 살펴보면 티베트는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밀교가 티베트의 종교문화를 주도하였다.

달라이라마제도의 연원은 인도의 전륜성왕과 관계가 있으며, 「아육왕전(阿育王傳)」에는 아쇼카왕의 전생인 어린이가 붓다에게 모래를 공양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쇼카왕은 호법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불교경전에는 보살이 인간계의 왕으로 탄생해 평화로운 중생세계를 이끄는 이상이 다양한 곳에서 설해져 있다. 후기밀교와 관련이 깊은 것은 인도 우디야나의 왕인 인드라부띠이다. 후기밀교시대는 초기경전에서 붓다가 제시한 모든 교의와 수행의 과제들을 현실화하는데 집중하였다. 때문에 보살이 인간생에 태어나기 위한 수행에 생기차제를 적용하고, 수행자가 열반에 들어 비로자나 법신여래의 실질적 성취를 위해 구경차제의 수행체계를 완성하였다. 인드라부띠왕이 인간계의 지도자로서 태어난 원력보살의 화신이듯이 달라이라마 제도도 원력보살이 티베트사회를 이끌기를 염원해 탄생하였다. 그것은 티베트가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불교문화가 쫑카빠를 통해 극성기에 도달할 때 완성되었다. 

현재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는 본명이 텐진갸초로 어릴 때 제14세대 달라이라마로 인정되었다. 14세란 말은 초대달라이라마가 14번째 몸을 바꾼 환생자로 지목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설명해야할 많은 종교·문화적 배경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초대달라이라마의 연기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초대달라이라마는 본명이 겐뒨둡(Gendun Drub, 1391-1474)으로 창지방 사꺄지역의 유목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돔부족에 속했고,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도둑이 가족의 캠프를 덮쳤는데 어머니는 해를 입을 까 두려워 아이를 담요에 싼 후 바위에 감춰두고 몸을 피했다. 

밤을 샌 후 돌아왔을 때 아이는 평화롭게 자고 있었고 옆에는 큰 까마귀가 독수리와 포식류 조류로부터 그를 지키고 있었다. 큰 까마귀는 본래 마하깔라의 화신으로 평생 겐뒨둡의 수호존이 되었다. 겐뒨둡은 어릴 때부터 종교적 성향이 강해 바위에 진언을 새기는 놀이를 하고 놀곤 했다. 

아버지가 7세 때 사망한 후 어머니는 겐뒨둡은 티베트장경 조판으로 유명한 나르땅으로 보내 교육시켰다. 이때 사원의 제14대 주지인 둡빠셰랍으로부터 우바새계를 받고 이름을 뻬마돌제라고 하였고, 15세 때 사미계를 받으면서 비로소 법명을 겐뒨둡이라 정식으로 이름하였다. 20세 때 비구계를 받았을 때 이미 계율과 논리학에 탁월한 실력을 보여 일체지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겐뒨둡은 25세 때 우지방을 여행하다가 간덴사원에서 운명의 스승인 쫑카빠를 만났다. 스승은 대면 후 4년 만에 입적하였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고, 스승은 제자에게 가사를 전함으로써 티베트에 교학연구와 수행의 전통을 일신하게 하였다. 겐뒨둡은 쫑카빠로부터 밀교를 전승받은 세랍셍게(1383-1445)를 동지 삼아 공부했고, 12년간 사꺄빠와 까담빠의 사원들을 두루 참배하였고, 특히 스승의 「보리도차제론」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1432년 겐뒨둡은 따낙리꾸의 사꺄사원의 주지가 되었는데 이 사원은 훗날 겔룩빠의 본산이 되었다. 또한 장첸사원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이후 무수한 제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샤꺄사원과 까규사원이 융성했던 짱지방 시가체에 유명한 따시룽뽀사원을 건립하였고, 여기서 불교대학을 세워 교육체계를 정비하였다. 특히 스승 쫑카빠가 티베트 최초의 새해법회인 묀람을 개설한 것을 계기로 따시룽뽀에서도 1463년 묀람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1,600명의 승려와 만 명의 재가자가 참석하였다. 1474년 겐뒨둡은 세수 84세에 따시룽뽀사원에서 앉은 채 입적하였다.

1475년 훗날 제2대 달라이라마로 지목된 겐뒨 갸초(Gendun Gyatso, 1475-1542)가 태어났다. 겐뒨갸초는 4살 때 초대달라이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되었는데, 이때부터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를 찾을 때 고승이 신성한 라모초호수를 관상하여 환생자를 찾는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겐뒨갸초도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1543년 제3대 달라이라마로 추앙된 소남갸초(Sonam Gyatso, 1543-1588)가 태어났다. 겔룩빠의 유명한 데뿡사원에서 수업한 소남갸초는 1578년 몽골황제 알탄 칸의 귀의를 받음으로써 이때부터 티베트불교는 겔룩빠가 최고의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남갸초는 닝마빠와 겔룩빠의 전통을 고루 섭렵하고, 몽골과의 관계를 원만히 지속하는데 노력하였다. 1588년 설법 하다가 그대로 입적하였다. 

달라이라마 제도는 석가모니붓다 시절부터 불교교단에 내재한 전륜왕의 이상을 티베트의 정치제도로 확립한 것이다. 밀교의 정신은 불교의 교학과 수행을 관념이나 이상에 그치지 않고, 실물을 통해 실재를 증명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티베트사회는 『열반경』에서 보이듯 불보살이 인간사회에 전생하여 중생세계를 인도하는 장면을 무수히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달라이라마제도와 관련해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흔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티베트불교는 아띠샤 이후 계율제일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인도교단의 삼보와 삼장, 삼학을 고수하려는 노력을 쉬지 않고, 나라를 잃었지만, 진리를 향한 인류의 꺼지지 않는 정신으로서 아직도 살아 존재한다. 이것은 남은 인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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