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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식의 특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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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3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0-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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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0-05 11:50 조회 1,50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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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심뽀이야기 (23회)

제7식의 특징(2)
말나식은 사량,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 ... 판단의 근거, 최종적 마음은 제7식에서 우러나와

제7식은 

사량(思量)하는 작용을 한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 이외에 사량이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8식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이다. 그래서 말나식은 사량,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예컨대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제5식인 신식(身識)이 촉감의 정보를 제6식으로 전달하면 제6식은 ‘아프다, 기분 나쁘다’라는 분별을 한다. 그러면 바로 제7식이 헤아려 활동을 한다. 누가 때렸지? 아니 저 자식이! 좋아 한판 붙어주지. 그리고는 코피가 터져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하게 된다. 아니면 ‘아이고, 센 놈이구나, 도망가자.’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런 결정을 제7식이 사량하는데, 제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런데 6식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가치중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7식인 말나식이다. 이 식은 사량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6식이 분별해 놓은 정보를 사량하고 판단해 구체적인 행위를 결정한다. 즉 제6식이 분별하게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제7식 말나식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을 나타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말나식은 그릇되게 인식, 

사량하는 경우가 있다.


제7식 말나식부터의 인간 심리 관찰을 보면, 불교에서 ‘마음’이란 단어의 분석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려준다. 우리가 잠을 자며 꿈을 꿀 때의 마음, 대상이 없는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깊이 사유하는 마음, 정신착란이 일어나 제정신이 아닐 때의 마음 등은 어느 깊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서양의 심리학 개념으로는 무의식, 잠재의식 정도이지만 불교에서는 마음의 어느 깊이까지 ‘침투’해 들어가느냐 하면, 대부분은 바로 이 제7식까지이다. 제7식을 ‘생각하고 헤아려 인식한다’는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바로 이 식을 통해 나오고 그 결과가 업이 돼 저장된다. 즉 인간의 거의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는 최종적 마음이 제7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옳다’, ‘그르다’라는 마음 자체를 일으키는 것을 아주 위험스럽게 여긴다. 어떤 경로나 어떤 이유로든 작위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을 번뇌의 주범으로 본다.

가령 집에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하자. 물건을 훔쳐 간 도둑은 내겐 분명 도둑놈이고 나쁜 놈이다. 그런데 그 도둑에게 되레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내게서 훔친 것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해서 그 기증받은 사람에게는 은인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도둑이라는 나의 ‘확신’은 주관적 사건의 결과로 인식된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사항은 아니란 말이 된다.


이와 같이 얼핏 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지거나 꽤 수준이 높아 보이는 것 같은 우리의 ‘의식’이 사실은 착오와 번뇌의 주범이라는 것이 유식학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상에서 보듯이 제7식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함으로써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는 심식(心識)이기도 하다. 

이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식의 시비분별 작용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때론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조차도 실은 제7식의 분별상(分別相)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이란 곧 이 제7식을 제어하려는 데에 그 시작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에고’에 집착하는 인간이 어찌 귀한 ‘에고’를 죽이고 뿌리 뽑겠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간절하고 간절해 스스로를 길바닥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정도의 수행이 되어야만 미련 없이 제7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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