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9)

페이지 정보

호수 25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9-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연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법경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정각사 주교 법경 정사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9-02 14:52 조회 2,136회

본문

연재글: 밀교문화와 생활 (44회)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9)

염심(鹽心)

중생의 마음을 염심이라고 표현한다. 염심(鹽心)은 소금의 마음이다. 왜 중생의 마음이 염심인가?『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소금의 마음이라 하는가? 생각에 다시 생각을 보태는 것을 말한다.’

무슨 뜻인가. 생각에 생각이 더 보태어져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염심, 소금의 마음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쓸데없는 생각으로 쓸데없는 데에 마음을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대일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하고 있다.‘소금의 성분은 짜다. 무릇 넣는 것마다 모두 짠맛을 늘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역시 이와 같다. 생각하는 일에 다시 생각을 더한다.’ 생각에 쓸데없는 생각을 덧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악업을 짓게 된다. 생각이 우리의 몸과 입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업(意業)이 먼저 일어나고 신업(身業) 구업(口業)이 그뒤를 따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생각이 먼저 일어나는 의업(意業)을 일러서 사업(思業)이라 하고, 뒤에 일어나는 신업과 구업을 사이업(思已業)이라고 한다. 생각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일어나는 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소』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욕망과 물질에 대해 생각하는 때처럼 바로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며, 다시 재차 생각하기를,「이 마음은 누구로 말미암아 생기는가? 어떤 모양을 짓는가」라고 생각한다. 또「마음에서 분명하지 않은 것을 관찰하고 다시 일어나게 되는 생각은 어떤 인연인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끝이 없는 것이다.’

욕망과 집착이 우리를 번뇌에 들게 한다. 또 그로 인하여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 전도망상(顚倒妄想)으로써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행하라고 가르친다. ‘이미 (생각이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한결같이 마음을 진실한 이치에 두고서 힘써 투철하게 수행해야 한다.’ 즉 일체제법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수행을 행해야 한다. 교리에 대한 이해와 교리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행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것이 수행(修行)이다. 수행은 입으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매우 중시한다. ‘심성은 생각을 여의었기에 생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분별 위에 다시 심수(心數)를 증가시키지 말라’고 한다. 그릇된 생각은 멈추고 진리에 대한 생각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바른 업이다. 정념(正念)이다.


체도심(剃刀心)

또 중생의 마음을 면도칼에 비유하기도 한다. 면도칼과 같은 마음을 체도심(剃刀心)이라 한다. 무엇을 체도심이라 하는가?『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면도칼의 마음이라고 하는가? 잘라 없애는 법에만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무슨 뜻인가? 잘라낸 것은 겁떼기 일뿐이고 진정으로 잘라내어야 할 것을 잘라내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본질을 잘라내지 못함을 이르는 마음이다. 비유하자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달을 보지 않고 마치 손가락만을 보는 것과 같다. 이를『소』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머리카락을 잘라 없애는 것은 속세(俗世)를 여읜 출가(出家)의 모습이다. 이른바 이 사람은 단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내가 이미 속세의 모습을 잘라 없애어 악법이 다시는 자랄 수 없게 하였다. 

무엇을 다시 구할 것인가?」이 마음은 최악임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구분지어 한계를 지어서 선근을 잘라 없애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한 것이다.’ 망상(妄想)의 극치를 보여준다. 머리를 잘랐다고, 삭발을 했다고, 어찌 마음까지 출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겉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다. 안을 닦아야 한다.

몇 글자를 공부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체도심은 이와 같이 아만, 아상으로 가득 찬 마음이다. 머리 잘랐다고 출가한 것이라 여기고,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을 없애야 한다.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야 한다. 이 가운데 치(癡)는 어리석음이오, 곧 체도심이다. 머리만 자르면 되는 줄 아는 마음이 체도심이오 어리석음이다. 본질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지혜를 모르는 마음이다.

따라서 체도심을 없애는 길이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이오, 나아가 탐진치를 소멸하는 길이다.

그러한 내용을『소』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모든 현성(賢聖)이 끊어야 할 바는 무명주지(無明住地)라는 삼독(三毒)의 뿌리이다. 만약 이것을 잘라서 망상(妄想)이 생기지 않게 하면 참된 출가라 말할 수 있다.’

무명(無明)이 곧 체도심(剃刀心)이다. 아상과 아만으로 어리석은 마음이다. 지혜 없음이오 진리를 알지 못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체도심을 없애기 위해서, 무명을 타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실천해나가야 한다.


미로등심(彌盧等心)

미로등심(彌盧等心)은 수미산(須彌山)의 마음이다. 미로(彌盧)는 수미산이다. 수미산은 수메루산, 메루산이라고도 하는데, 한문으로 소리 나는대로 번역하여 미로산(彌盧山)이라고 한다. 수미산은 힌두교 및 불교의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솟아있다는 상상의 산으로, 본래 힌두교 신들이 산다고 전해지는 상상의 산인 메루산을 불교에서 수메루산이라는 이름으로 차용하였고,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메루산은 미로산(彌盧山)으로, 수메루산은 수미산(須彌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수미산과 같은 마음은 어떤 것인가?『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수미산과 같은 마음이라고 하는가? 항상 높고 거만한 마음을 두는 성품을 말한다.’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만과 아상으로 가득 찬 마음이다. 교만하기가 이를 데 없는 마음이다. 이를 수미산에 비유한 것이다. 원래 수미산은 상상의 산으로, 세계의 중심에 솟아 있는 최고의 산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중생의 마음을 이 수미산에 비유하고 있다. 내가 제일이고 최고라는 아상과 아만심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중생의 마음이다.

수미산과 같은 마음을『대일경소』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수미산은 높아서 온갖 봉우리를 뛰어 넘기에 그 위로 올라갈 것이 없다.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언제나 고거(高擧)를 성품으로 한다.’고 하였다. 고거(高擧)는 높은 데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교만심(驕慢心)을 말한다. 예의가 없고, 버릇이 없으며, 항상 잘난 체하고, 거만하고 오만하며,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이다. 

그래서『소』에 이르기를, ‘스승과 스님과 부모 등 존경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 마치 높은 당기(幢旗)가 구부려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이것을 구부리려고 하면 절대로 굽혀지지 않는 것과 같아서 끝내 그 성품을 바꾸지 못한다.’ 자존심이 강하여 자기의 고집을 끝내 굽히지 않는 마음이다. 아만과 아집이 가득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수행으로 연결될 수 없고, 악업을 짓는 인(因)이오 근(根)이다. 이 교만심을 없애야 한다. 수미산과 같은 마음을 없애야 한다.

『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인욕하고 겸손함으로써 모든 중생들에 대해 대사(大士)라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이를 수미산과 같은 마음을 다스리는 바로 삼아야 한다.’ 인욕(忍辱), 하심(下心), 유화선순(柔和善淳)과 자비로써 행해야 수행자요, 보살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