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비트켄슈타인의 언어철학

페이지 정보

호수 6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6-11-18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언어철학 서브카테고리 -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은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06 06:30 조회 4,055회

본문

비트켄슈타인의 언어철학
언어의 허구에 속지 말아야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이 말하는 “한 방울의 문법으로 응축되어버린 전 철학의 구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의 사구백비(四句百非)가 의미하는 것과 같다. 모든 철학적 구성들이나 물음들을 언어적 또는 문법이 일으킨 환상임을 누설하여 인간의 실존의 불안과 관련되어 있는 철학적 구름들을 흐트러뜨리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발판은 무엇인가?

우리가 단 하루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언어란 과연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언어적 또는 문법적 그물을 조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사상적 미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철학은 로고스를 추구해온 역사이다. 로고스는 절대적 존재라고 생각되는 신의 말씀이자 사유이며, 동시에 이 우주의 설계도이다. 

신의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는 우리 언어의 논리의 신비화 또는 숭고화가 아닌가? 

비트겐슈 타인의 후기 철학은 언어의 논리를 신비화시키려는 저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거역한다. 논리적 또는 문법적으로 모순이 없는 낱말이나 개념은 그것에 대응하는 실재를 반드시 갖고 있다는 플라톤적 관념적 실재론자들이 계속해서 되뇌어온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실재론을 부정하는 것은 언어적 또는 문법적 그림자를 실재로 착각한 전 형이상학의 해소에 상당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언어적 논리의 그물에 갇혀서 온갖 번뇌의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적 존재들을 해탈시키는 것이 비트겐슈 타인의 후기 철학의 목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의 핵심 개념인 삶의 형식으로서의 언어놀이의 개념은 상당히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지한 것이다. 익살스럽다는 것은  학을 통해서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이를테면 형이상확자들의 철학의 개념에 대해서이며, 그리고 진지 하다는 것은 놀이에 불과한 철학을 포함한 우리의 삶을 바로 보려는 철학자들에 대해서이다.

모든 철학의 구름들을 한 방울의 문법으로 응축시켜버리기 위한 비트 겐슈타인의 철학적 치료주의가 채택 한 언어놀이의 개념과 방법에 의하면, "이00는 사람이다.”와 “이00 는 사람이 아니다.” 등과 같은 명제의 본질이라고 생각되는 ‘참’과 ‘거짓’의 개념은 불교가 말하는 ‘같음’과 ‘다름’의 개념에 속하거나 문법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는 개념이다. 

‘참’ 과 ‘거짓’의 개념이 명제가 무엇인지 를 결정하는 문법의 부분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문법적 규칙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제도에 불과한 것이지 실재의 본질에 준거해서 만들 어진 것이 아니기 대문에, 프레게나 비트겐슈타인 자신이『논고』에서 생각했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참’과 ‘거짓’이 명제에 들어맞는 것도 그 역도 아니다.

 따라서 ‘참’과 ‘거짓’, 또는 ‘같음’과 ‘다름’의 배타적인 관계를 발판으로 어떤 것이 명제이고, 명제가 아닌가를 결정한다는 의미는 전통적인 원자론적 의미론이 생각한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오히려 형이상 학적이며 원자론적인 의미론은 문법적 규칙과 명제와의 관계를 오해해서 ‘이름-대상’ 이라는 단순한 도식 하에서 우리의 언어의 쓰임을 설명 하려는 사이비—과학적인 철학이 산출해낸 문법적 환상일 뿐이다. 동시에 비트겐슈타인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구의 신비화를 바탕으로 우리의 언어적 따짐이나 다툼을 우상화하려는 그 뿌리를 뽑아버린다.

(정리 김은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