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불교경전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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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01 14:51 조회4,67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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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의 양이 방대하다는 것은 불교 공부를 해 본 사람이면 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경전의 내용이 아예 다른 경우도 많이 있지만 비슷한 이름의 경전도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느 경전이 언제 만들어졌고 서로서로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가 등을 시시콜콜하게 따지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불교를 실천하는 데는 그런 것들이 썩 중요하지는 않지만 학자들은 원래 그런 것들을 따지기 좋아합니다. 기독교의 바이블처럼 간단하고 단순한 교전을 놓고도 그렇게 말들이 많은데 불교 경전은 양이 그것보다 수천 배가 더 많으니 학자들 할 일이 오죽 많겠습니까? 그것도 빨리어, 산스크리트, 한문, 티벳어 등등 온갖 나라 말들로 전승되어 오니 공부할 것 없다고 큰 소리치는 세간 사람들에게 불교 공부 해보라고 권해보고 싶습니다.
아무튼 불교의 경전이 이처럼 포괄적이고 풍부한 것은 진리에 대한 불교의 관용적이고 유연한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대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설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설해도 듣는 사람의 이해 정도에 따라 표현을 달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설법 방식을 다른 말로는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합니다. 환자의 증세에 따라 다르게 약을 처방해 주듯이 부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거기에 알맞은 법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설법방식은 예수의 설법 방식과 비교하면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상대에 따라서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신의 말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오직 신의 말씀이라는 것을 전했으며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설법 방식은 강력한 메시지는 전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의 생각을 너무나 강력하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려했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이의 미움을 사서 십자가에 매달려 젊은 나이에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더욱 깊이 통찰하여 상대에 맞는 유연한 설법방식을 구사했더라면 기독교가 오늘날 보다는 훨씬 덜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진리에 입각하여 설법하되 상대방이 잘 알아듣도록 상대방의 근기와 수준에 맞추어 차근차근 설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제자 중에 소냐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이 비구는 빨리 깨달음을 얻을 욕심으로 너무나 열심히 수행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거문고의 비유를 들어 소냐에게 여유를 가지고 수행하라고 타일렀습니다. 즉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것은 도리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나룻다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나룻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다가 깜빡 졸았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아나룻다에게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아나룻다는 잠을 자지 않으며 너무나 열심히 정진한 결과 마침내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소냐의 경우와 반대로 아나룻다에게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고 마침내 아나룻다는 눈까지 멀어버렸지만 대신에 신통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상대방에 따라 다른 방법을 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법방식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직접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유익할지 모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에 오직 경전을 통해서만 진리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고 입멸하시기까지 45년간에 걸쳐서 수많은 법문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8만4천 법문’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말하자면, 8만4천 가지나 되는 다양한 설법을 하셨다는 것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설법들 가운데에는 물론 중복되는 내용도 더러 있지만 때로는 모순 되게 보이는 설법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설법을 듣는 상대방의 근기와 수준에 따라 설법의 방법과 내용을 달리 하셨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덧붙여지고 그것이 논서의 형태로 이루어져 대장경 속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경전의 분량이 늘어났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되살린다는 취지에서 《반야경》이나 《유마경》?《승만경》?《법화경》?《화엄경》, 그리고 《아미타경》 등의 경전이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경전은 부처님 당시의 언어로써 암송되어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기원전 3세기부터 겨우 문자로써 정착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처님 입멸 후 거의 200년이 지나도록 오직 암기력에 의존하여 입에서 입으로 부처님의 말씀이 전해졌기 때문에 그 동안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때에 문자로 정착된 경전이 주로 《아함경》 계통의 경전이며, 《아함경》이야 말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전승하고 있는 경전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각 지방으로 전해지면서 그 지방의 문화적 풍토에 따라 그 지방의 언어로써 새로운 형태를 띠고 재창조되었기 그러한 경전들도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주로 대승경전이 이러한 유의 경전인데 그 분량이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함경》류 보다도 훨씬 많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어느 것이나 첫머리에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입멸 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의 생전의 말씀을 취합하고 정리할 때에 각자가 들은 대로 암송했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멸 후에 나온 대승경전의 경우에도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대승경전도 부처님의 직설과 다름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대승경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정신을 되살려 새롭게 만들어진 경전이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부처님의 직설과 다름없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경전은 어느 것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을 기술한 것으로서 듣는 사람의 수준과 근기에 맞춘 것이기 때문에 그 종류가 다양하고 내용이 풍부한 것입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