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완전한 행복과 불교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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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3-23 12:18 조회5,93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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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나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 배경에는 이런저런 사연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일 것입니다. 그 중에는 지금 당장은 행복하지만 이 행복을 언젠가는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종교를 가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교를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기 이전에 먼저 이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기껏해야 건강을 유지하면서 돈이나 많이 벌어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요즘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더더욱 경제적인 안정을 행복의 첫째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른바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면 행복이 다 이루어진 듯이 생각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여기에 더하여 명예를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합니다. 특히 요즘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리면서 사회적으로 이름난 사람들 중에는 명예나 권력에 목숨 걸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행복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목표하는 사업체를 확장한다거나, 혹은 문학가나 예술가라면 마음에 드는 작품의 완성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추구하는 이러한 행복은 대체로 일시적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움켜쥔다고 하여도 그것은 언젠가 허물어집니다. 설사 어느 정도의 부와 명예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거나 성취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동안의 행복감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 다시 수고로움이 따라야 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고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노쇠해지면 자연히 병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언젠가는 이별의 때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다음 세계의 행복을 추구하며 위안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불확실하며 다음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현재의 고통이 너무 견디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보면, 일반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이 얼마나 허무하며 일시적인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는 그러한 일시적인 행복의 보장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가진 육체로써 누리는 행복은 모두 덧없고 일시적인 행복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삿된 종교일수록 이러한 일시적인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더욱 열을 올립니다. ‘우리 신을 믿으시오, 아니면 우리 교주를 믿으시오. 그러면 병도 낫고 재물도 생기고 권세도 누릴 수 있습니다.’ 삿된 종교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천당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어떤 모습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애기의 모습인지, 장년의 모습인지, 늙었을 때의 모습인지. 또 그들이 영생하며 누린다는 행복의 성질은 과연 무엇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그저 그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지혜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소리를 듣고 조금만 따져보아도 그들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금방 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미국의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라는 종교사회학자는 ‘종교란 궁극적인 관심사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에다 두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종교는 돈이고, 명예나 권력에다 두고 있다면 그의 종교는 명예나 권력이 된다는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자기의 욕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충족하기 위하여 종교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교일수록 인간의 이러한 심리를 더 잘 이용합니다. 우리의 신을 믿으면, 우리의 교주를 믿으면 이러한 세속의 모든 욕심이 충족된다고 말입니다. 돈 잘 벌 수 있다, 진급도 잘되고 시험에도 잘 붙는다, 새벽 기도 한번 나와 봐라, 이번 선거는 틀림없이 당선이다, 이렇게 말하며 호객행위를 하는 종교는 사교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들을 진리로 이끌기 위하여 혹 방편으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종교는 그런 방편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이들이 하는 짓은 사람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방편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하고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호객행위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세속적 이익을 약속하면서 신도를 끌어 모아 그 돈으로 골프도 치고 고급차를 몰면서 외국에 몰래 돈을 빼돌리기도 합니다. 그들의 교리 구조가 이런 짓 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습니다. 합리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지혜를 일깨우는 교리가 아니라 무조건 믿는 것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조건 믿어라, 의심은 죄악이다.” 신에 대해서도,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도, 그것을 설교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조그만 의심도 일으키지 마라, 무조건 믿어라, 불합리 할수록 따지지 말고 더욱 굳센 믿음을 가져라.” 그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자가 똑똑해지면 그들에게는 큰일입니다. 신자들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생각의 줄기가 자라는 것을 끊어버립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종교가 이런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사교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특히 유일신 중심의 종교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 눈을 돌렸다가는 자기의 신이 질투하고 노여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 되어야 하고, 다른 종교 신자를 미워해야 합니다. 서로 자기의 신만을 옳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양보나 타협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타 종교인들과 화합한다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못할 일로 간주됩니다. 무조건 상대를 깡그리 쳐부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들이 믿는 신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종교들이 판을 치는 우리나라가 과연 편할 날이 있겠습니까? 이런 종교에 의지해서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교라는 종교는 이러한 것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불교에서도 궁극의 목표는 행복의 추구에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사고방식은 이러한 저차원적인 행복의 추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행복은 유한하며 일시적이라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완전한 행복, 영원한 행복,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사후의 다른 세계나 아득한 먼 훗날의 일도 아니요, 지금 당장 실현 가능한 행복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행복을 해탈(解脫), 열반(涅槃), 혹은 깨달음의 지혜(智慧)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절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