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인생관의 확립과 종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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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2-11 09:36 조회6,63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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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철학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과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해답도 나오지 않으니 그저 욕망이 내키는 대로 편한 것만 추구하다가 죽겠다는 겁니다. 자기 욕심대로 다 이루어지면야 그보다 더 즐겁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산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잠깐 좋은 일이 있다 싶으면 온갖 고통이 밀려듭니다. 좋은 일은 순식간이고 괴로움은 오래 갑니다. 그래서 운명을 탓하고 태어난 것을 탓하고 주위 사람을 원망하며 사회를 원망합니다. 인생의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 삶이라는 것을 반성해봐야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불교의 오래된 경전 중의 하나인 《법구경(法句經)》이라는 경전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빈둥빈둥 먹기만 하고
잠만 자고 있는 어리석은 자는
먹이로써 키운 돼지처럼
몇 번이고 윤회를 되풀이한다.
그렇습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준비가 없이 욕망에 따라 되는 대로 살다 보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삶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우리가 어떤 일을 착수할 때는 그것에 대한 목표를 뚜렷이 설정해 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거기에 맞추어 실천할 때에 그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의의나 목적,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되는 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면 그것보다 더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네거리 한 복판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칩시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아마 이렇게 묻는다면 다들 그를 비웃을 것입니다. 자기 갈 곳도 모르고 길을 나섰다고 말입니다.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뚜렷한 인생관이 서지 않는 사람도 네거리에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렵사리 인간으로 태어나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냥 이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시겠습니까? 먹고 자고 일하고 또 먹고 자고 일하고.... 그러다가 화내고 미워하고 자신을 학대하다가 한 세상을 마감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살다간다면 이 지구에 오염물질만 남기고 인류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버러지에 불과합니다. 아니 버러지보다도 못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벌레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더라도 최소한 오염물질을 배출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은 인간으로서의 삶의 보람을 만끽하며 최소한 뭔가 이웃에게 도움은 주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지구상의 석유가 앞으로 40여 년 밖에는 못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름도 가능한 한 아껴 써야 한다고 했더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죽고 난 다음에야 세상이 뭐가 되던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 치고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 못 봤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의 삶도 충실하게 꾸려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뚜렷한 인생관,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삶의 의의와 목적에 대해 전혀 생각도 못해 본 사람들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관과 가치관의 기준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바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인간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생을 꿰뚫어보면서 거기에서 삶의 의의를 발견하고 삶의 목적을 뚜렷이 하여 보람찬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을 돌린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의 일들을 해결하기에도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이어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생계를 꾸려가야 합니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물질위주의 사회가 되어 직장을 잃거나 저축해 놓은 돈이라도 바닥나는 날은 그야말로 앞이 캄캄해집니다. 옛날 같으면 구덩이 파고 풀뿌리라도 캐어 먹으며 연명하겠지만, 현대 사회는 그것마저도 쉽게 용납하지 않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어려운 대로 고충이 있어 인생이란 것을 깊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습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더욱 더 가지고 싶어 하며 욕심을 부리느라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누리는데 정신이 팔려 자신의 삶이며 이웃을 돌아 볼 겨를이 없습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돈을 물 쓰듯 쓰며 명품족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부유층들이 국제적인 비웃음을 사고 있는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닥쳐야만 삶이라는 것에 겨우 눈을 돌리게 됩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밀려난다거나 잘 되던 사업이 도산하게 됩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다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추락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방법을 모색해 보아도 그런 상황에 부딪치면 앞이 캄캄할 것입니다. 천연색으로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무채색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혹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이제는 인생을 좀 편하게 살겠거니 하는데 병이 덜컥 나기도 합니다. 아니면 갑자기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 죽지는 않더라도 한참 동안은 병고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계기가 있어야 인간은 겨우 자기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인생의 의의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돌리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대체로 평소에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기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것이 인생 목표의 전부인 양 몰두합니다. 돈을 얼마를 벌어야지, 집은 얼마만한 것을 구해야지, 회사는 얼마만큼 키워야지 하면서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이 원하던 목표에 도달해도 또 다른 목표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면 또 그것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지 미워하며 원망하고 거꾸러뜨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황혼이 찾아옵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기 곁을 떠납니다. 남에게 욕 들어먹으면서 까지 움켜쥐려던 재산과 권력도 누려보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인생의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살면서 커다란 상처를 입거나 좌절했을 때뿐입니다.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잘 나갈 때는 그것을 즐기느라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엄청난 계기가 있어야 사람들은 겨우 인생의 의의에 눈을 돌려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당하여 삶을 돌아보아도 자신들의 사고로는 도저히 인간의 본질이나 인생의 의의를 꿰뚫어보는 일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생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철학이나 종교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의존해 삶을 꾸려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철학을 통하여 인생의 비밀을 풀어보려고 해도 일반 사람들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인 학문적 소양이 있어야만 누군가가 제창한 철학체계를 겨우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거기에 매달려 공부해봤자 그것이 정말 인생에 대해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 궁극적 해답을 제시해 주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철학의 맹점은 우리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체계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름난 서양의 철학자들 중에는 거창한 철학을 제시해 놓고도 정작 자신의 삶은 거기에 맞추어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이 된다든가 정신병을 앓거나 지독한 수전노로 살다가 생을 망친 철학가나 사상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철학이나 사상에 의지하여 인생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해도 올바른 실천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작 그러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시켜 보려면 방법을 몰라 난감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쉽게 종교에 의지해 생의 의문을 풀려고 하며 거기에 의존하여 자신의 나약한 삶을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며 삶의 의의는 무엇인지, 또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보다는 뭔가 절대적인 힘,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여 자신의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좀 더 나은 생활, 행복한 생활을 누려보자는 데에 일차적인 목적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가장 큰 목적은 행복의 추구일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 인생관을 확립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행복의 추구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종교가 정말 행복의 추구를 위해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모든 종교가 정말 행복의 추구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종교는 많이 있지만 종교로 인해서 도리어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번성하던 중세를 암흑기라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또 최근의 종교 갈등으로 인한 세계 곳곳의 분쟁을 생각해 볼 때, 모든 종교가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종교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제시해 주며, 그것을 실현해 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종교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관을 확립하고 후회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종교는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일러주는 종교여야 하며 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하며 나 혼자 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종교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