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삼보(三寶)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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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10:47 조회8,1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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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라면 삼보(三寶)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 것입니다. 불교도로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를 삼보라고 하는데 불(佛), 법(法), 승(僧) 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은 곧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불교를 알게 해 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큰 깨달음을 이루시고 부처가 되시어서 우리들에게 진리를 일러주셨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의 개념이 확대되어 여러 부처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삼세제불이라는 말이 있듯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무수한 부처님이 계십니다. 시방불이라는 말은 동서남북 상하좌우 모든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일컫습니다. 이 모든 부처님을 불보라고 합니다만 가장 근본이 되는 분은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법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만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혼자만 깨달으시고 우리들에게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전하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불교라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우리는 비로소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법보로서 존중하는 것입니다.

삼보 가운데의 마지막인 승보는 상가를 의미합니다. 상가는 인도말로 ‘화합의 무리’란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출가한 스님인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재가신자인 우바이와 우바새가 있습니다. 출가 스님은 재가신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부처님을 대신하여 전하여 주며 재가 신자들은 그 보답으로 출가 스님을 봉양하며 공경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출가자와 재가자가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후세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임을 통틀어서 상가라고 하며 여기에서 승(僧)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즉, 상가라는 인도말을 음사하다 보니 승가가 되었고 다시 줄여서 승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이라고 하면 출가 스님들만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이라는 말을 쉬운 말로 풀이한답시고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면서 불교 의식에 이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지막 구절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입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해야 할 것을 ‘거룩한 스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불교의 본 모습이 무척 왜곡되고 있습니다. ‘승가’라는 본래의 의미는 어디가고 스님들만 거룩한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이른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화합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며 퍼뜨리는 거룩한 모습에 귀의해야 한다고 할 것을 스님들만 거룩하다고 해 놓았으니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로 스님들만 거룩한 줄 알고 상가의 일원인 자신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또한 철없는 어린 스님(나이든 스님들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이지만)들은 진짜로 자기가 거룩한 줄 알고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불교의식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이 구절을 ‘거룩한 상가에 귀의합니다’로 바꾸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스님을 존경하는 것이 나쁠 거야 없지만 본래의 의미가 왜곡됨으로써 수많은 재가불자들이 제 자리를 못 찾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아무튼 삼보라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는 집단인 승가라는 것만 우선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삼보에 대해서는 경전에 여러 가지의 분류가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가 비교적 보편적으로 말해지는 삼보입니다.
첫째는 최초삼보(最初三寶)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새벽별을 보고 성도하시어 샤카무니 붓다, 즉 석가모니불로 되신 것을 최초의 불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도하신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을 상대로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를 말씀하신 것을 최초의 법보라 합니다. 또한 이 때에 이 법을 듣고 제도되었던 교진여 등의 다섯 비구를 최초의 승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주지삼보(住持三寶)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후세에 전하여지는 삼보를 가리킵니다. 즉, 불상이나 부처님의 도상 등 부처님을 상징하고 표현한 모든 것을 불보라고 합니다. 법보는 종이나 비단에 써진 경전 말씀 혹은 돌이나 나무에 새겨진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일컫습니다. 승보는 절을 지키고 있는 출가의 비구와 비구니 등을 일컫습니다. 이 주지삼보는 우리 눈에 유형적으로 나타난 것에 비중을 두고 삼보를 일컬을 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사찰의 모습에만 한정시켜 삼보를 말할 때 주지삼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절에 가면 부처님의 형상이나 부처님 사리 등이 불보이고 쌓아 놓은 경전이나 대장경 목판 등이 법보이고 삭발한 스님들이 승보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성삼보(自性三寶)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성 속에 이미 삼보의 무량한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고 보고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즉, 사람마다 불성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불보이고, 사람마다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법성(法性)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법보이며, 사람마다 청정하고 화합한 것을 좋아하는 심성이 있으니 이것을 일러 승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자가 되는 가장 첫걸음입니다. ‘귀의’라는 말은 인도말인 ‘나모(Namo)’의 의역으로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이러고 할 때의 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목숨이 다하도록 의지하고 받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삼보의 이러한 의미들을 잘 알고 참된 불자로서 자성삼보를 찾아가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삼보인 주지삼보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을 의지하고 다잡으며 우리 마음속의 삼보를 찾아가는 것이 불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자신을 섬으로 삼고 진리를 섬으로 삼으라”고 하신 말씀도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자신 안에서 보물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삼보는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