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불교의 내용적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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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6-05 13:38 조회8,2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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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구분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불교는 워낙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지역에서 변화되어 왔기 때문에 그 모습이 실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바른 모습을 알기가 무척 어렵다고도 말합니다. 불교를 구분하는 방법 가운데에서 시대적으로 구분하는 방법과 지역적으로 구분하는 방법과 내용적으로 구분이 있습니다. 이번엔 내용적 구분에 대하여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불교를 교의(敎義)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대략 소승과 대승, 현교(顯敎)와 밀교(密敎), 자력교(自力敎)와 타력교(他力敎), 돈교(頓敎)와 점교(漸敎), 권교(權敎)와 실교(實敎)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소승과 대승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불교는 무명(無明)의 이 언덕에서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수레나 배에 비유하여 ‘승(乘)’이라고 하는데, 소승이란 자신만의 깨달음과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자리적인 것을 말하며, 대승이란 나와 함께 남도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큰 탈 것이란 뜻입니다. 또한 소승은 석존의 가르침을 듣는 것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성문승(聲聞乘)이라 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스스로 깨닫는 것을 연각승(緣覺乘) 혹은 독각승(獨覺乘)이라고 하며 성문승과 연각승을 합하여 이승(二乘)이라 합니다. 이것도 물론 대승 측에서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여기에 반하여 대승이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하여 구제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크고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이상으로 삼는 것은 보살 혹은 불타가 되는 것이므로 대승을 보살승(菩薩乘) 혹은 불승(佛乘)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성문승이나 연각승의 이승을 소승이라고 폄하하고 보살승 혹은 불승을 대승으로 자부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현교(顯敎)와 밀교(密敎)의 구분입니다. 밀교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7세기 중반에 인도에서 일어난 후기 대승에 속하는 불교로서 손으로는 결인을 하고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며 마음으로는 불의 지혜와 자비를 관하는 신(身)?구(口)?의(意)의 삼밀행(三密行)과 가지기도(加持祈禱)에 의하여 성불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가지기도란 부처님의 초월적인 힘과 자신의 기도력에 의지하여 깨달음에 빨리 이르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자내증(自內證)의 경지를 직접 체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로자나불을 밀교에서는 특히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합니다. 대일이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광명이 큰 태양과 같다는 의미로서 대일여래라고 하면 우주의 중심이 되는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로자나부처님이나 대일여래는 진리인 법을 인격적으로 상징화한 부처님, 즉 법신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밀교에서는 삼밀행과 가지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우주의 중심이 되는 법신불의 진리를 직접 체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반하여, 현교는 언설에 의한 드러난 가르침으로 그것에 의하여 부처님의 진실한 경계를 체득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경치가 아무리 좋다고 말이나 글로써 표현해 보았자 직접 가서 구경하는 것만 못하다는 얘깁니다. 이와 같이 현교는 말이나 글로써 진리를 표현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주고 있으나 밀교에서는 그 사람을 직접 그곳으로 데려가서 체험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또 삼밀행과 가지기도를 위주로 하는 밀교에서는 즉신성불을 주장하며 삼겁을 지나야 성불할 수 있다는 현교와의 차별을 말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밀교가 현교 보다 뛰어나다고 보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으로, 사실은 밀교도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은 그렇게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철학을 모두 포용하여 세련되게 종합하고 진언(眞言)과 결인(結印), 관법(觀法) 등을 통하여 몸과 입과 생각을 동시에 제어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삼밀행(三密行) 등의 구체적인 실천체계를 갖춘 밀교는 매너리즘에 빠진 지금의 불교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그림으로 나타낸 밀교의 만다라(曼茶羅;ma??ala)나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간략하게 표현하면서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는 다라니(陀羅尼;dh?ra??) 등을 통한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수행체계는 우리의 시청각을 강렬하게 사로잡아 진리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과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밀교의 적극적인 현실 긍정의 태도야말로 승속을 초월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의 또 하나의 구분법으로서는 자력교(自力敎)와 타력교(他力敎)를 들 수 있습니다. 타력교는 주로 정토교(淨土敎)에서 말하는 것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의하여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즉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부르고 예배하여 자신의 힘이 아닌 여래의 힘에 의하여 구제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자기의 정진노력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을 자력교라고 합니다. 타력교를 정토문 혹은 이행도(易行道)라고 하는데 반하여, 자력교는 성도문(聖道門) 혹은 난행도(難行道)라고 합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난행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래의 힘에 의하여 구제를 바라는 타력교는 언뜻 보면 다른 종교에서 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력교라 하여도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여야 합니다. 무조건 부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을 통하여 지혜를 싹틔우고 자비심을 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깨달음의 빠르고 느린 정도에 따라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속히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돈교라고 하며, 순서를 차근차근 밟아 긴 수련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점교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로 북방불교, 특히 중국불교에서 발달한 구분으로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 줄여서 교판이라고 합니다. 돈교와 점교의 구분은 각 종파마다 다른데, 예를 들면 천태종이나 선종, 혹은 진언종 등은 자신의 종파를 돈교라고 부르며 다른 종파는 점교라고 주장합니다.


이 밖에 교판에 의하여 불교를 구분하는 가운데 하나로서 권교(權敎)와 실교(實敎)가 있습니다. 권교는 중생들을 참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서 설해진 것이며, 실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천태나 법화종에서는 삼승(성문승?연각승?보살승)을 권교라고 하며, 법화경의 일승묘법(一乘妙法)이야말로 실교라고 주장합니다.


돈교와 점교, 혹은 권교와 실교 등은 주로 중국에서 발달한 교리 판단의 방법으로서 자신들의 교리의 우수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내세운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불교를 교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방대한 불교의 흐름을 몇 가지 갈래로 구분지어 살펴봄으로써 불교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흔히 불교의 어느 한 부분만 보고 그것이 불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워낙 다양하게 발전했기 때문에 그 본질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불교는 시기적으로도 2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변천해 왔을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거의 온 세계에 걸쳐서 확산되어 왔습니다. 온 세계에 걸쳐서 확산되었다는 말에 대해서 부가 설명을 드린다면 불교는 이제 아시아권을 넘어 미주와 유럽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남미, 호주 등지에까지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러한 시기적, 지리적 변화 이외에도 교리적으로도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를 분석하고 새롭게 해석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파가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통하여 불교의 탄생동기와 성립과정을 살펴보고 그분의 가르침의 배경을 잘 이해한 다음 근본교리를 공부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