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불법인연을 소중히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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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5-22 14:09 조회7,76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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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의 소치라고 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오다가다 부딪쳐도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인연 가운데에서 다른 곳도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나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또한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더구나 부처님의 은혜로 함께 불교 공부를 할 수 있는 도반(道伴)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100년도 못되는 삶을 살면서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은지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내지를 못하고 온갖 괴로움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혼란만 더해 갈 뿐입니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지금까지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해 왔습니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면서 좀 더 풍족한 삶을 누리려고 발버둥 쳐 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더 나은 삶을 쟁취하기 위하여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를 돌아보면 과학과 물질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삶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더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삶이 과거보다 더 행복한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옛날의 인정 많던 시절보다도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요즘은 지속되는 불경기로 인해 경제적인 곤란을 받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카드빚이다, 대출금 상환이다, 각종 이자에 공과금이며 모든 것이 돈입니다. 어른도 돈, 아이도 돈, 기업과 정부도 늘 돈타령입니다.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때로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나라를 잃고 핍박받던 일제 때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6.25 때만큼이야 하겠습니까? 주린 배를 물로 채우던 5,60년대의 보릿고개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다행히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시기를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은 정말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대체로 지나간 고통보다는 현재의 아픔을 더 크게 느낍니다. 지나간 과거보다는 언제나 지금 당장을 더 어렵다고 느낍니다. 과거의 아픔은 그저 우리의 기억이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망각이라는 것도 때로는 편리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의 커다란 아픔보다는 자신의 사소한 아픔을 더 크게 느낍니다. 이 또한 이기적인 우리 인간의 생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따뜻한 가슴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것은 다른 후진국들에 비해서 그나마 낫습니다. 모든 면에서 안정되어 있는 구미의 여러 나라들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기근이나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에 비해서는 아직도 여건이 좋습니다.
몇 년째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처참하게 죽어 가는 저 아프리카 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텔레비전에서도 더러 보셨겠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오지도 않는 젖을 아기에게 물리고 입가에는 파리가 잔뜩 달라붙어 있어도 그걸 떼어놓을 기운조차 없어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 소말리아나 저 이디오피아 여인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죽 한 그릇, 물 한 모금이 없어 영양실조로 서서히 죽어 가는 어린이들도 보셨을 것입니다. 병든 닭처럼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수많은 어린이들. 속수무책으로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머니....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곳에서는 구호단체에서 공급해주는 죽 한 그릇, 물 한 바가지로 온 가족이 하루하루를 버티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장 휴전선 너머 북한 동포들만 해도 굶주림과 추위에 신음하고 있지않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 입에 넣는 쌀 한 톨이 얼마나 소중한지, 물 한 모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껴질 것입니다. 식탐을 주체하지 못하고 과식해서 비만으로 뒤뚱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기아에 허덕이며 생사를 넘나드는 그들을 방관하면서 해마다 몇 조원이나 되는 음식물을 낭비하는 우리는 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아나 질병만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전쟁 통에 팔다리를 잃고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서 외국인에게 구걸의 손길을 내미는 그런 어린이들도 많이 봅니다. 저 어린 나이에 불구가 되어 평생을 저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어린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철없는 어른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저런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는 폭탄이 터지고 퍼붓는 총알을 피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안도해야 하는 비참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사의 경계에서 당장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도 과거에 이런 비참함을 겪었고, 우리가 지혜롭게 살지 못하면 또 언제 이런 지경을 당할지 그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런 저런 고통을 겪고 있는 지구상의 다른 민족들에 비하면 어쨌든 우리는 그나마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렇게 왜 사는 지도 한번쯤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더 지혜롭게 살 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사계절이 분명하고 전쟁의 재앙이 없는 이 땅에 태어나 그럭저럭 안온한 삶을 누리면서 더구나 불법인연을 만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우리는 무한한 행복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계 이렇게 여섯 종류의 세계로 나눕니다. 이것을 육도(六道)의 세계라고 하며, 우리 중생들은 이 육도를 번갈아 태어나며 윤회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관념의 세계를 이렇게 상징적인 것으로 나눈 것이기는 합니다만 불교의 이치를 깊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업보를 설명할 때에 이렇게 설명하면 비교적 쉽게 알아듣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도윤회설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고통으로만 가득 찬 지옥도 아니고, 배만 태산 같고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하다는 아귀들이 사는 세계도 아닙니다. 또한 어리석은 과보로 태어난다는 축생의 세계도 아니며, 싸움만 하면서 날을 보낸다는 아수라의 세계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갖 복을 누린다는 천계에는 태어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그 자체를 다행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육도 가운데에서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중생은 너무나 고통에 겨워 불법인연을 맺어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또, 아수라로 태어난 중생은 싸움만 하느라 수행이란 것은 돌볼 겨를이 없고, 복을 많이 지어 태어나게 된다는 천상계는 너무 편안하고 행복에 겨워서 수행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고통과 행복이 적당히 어울린 환경 가운데에서 수행이란 것에 눈뜰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난 이 한 번의 기회를 어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경에도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인연을 만난다는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비유를 들어 얘기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처럼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눈먼 거북이가 한 마리 살고 있습니다. 그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밀다가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판자에 난 구멍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려울뿐더러 더구나 불법을 만나기는 더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다행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짐승도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 다행이도 불법인연을 만나 이렇게 불교공부를 하고 있으니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러한 불법인연을 소중히 여깁시다. 우리에게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주시는 부처님을 모시면서 우리의 행복을 돌아보고 세상의 여느 가르침보다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며 나의 벗이 되어 나를 밀어주고 이끌어주는 도반을 소중히 여깁시다. 우리의 행복은 이러한 불법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