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미신과 맹신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7-29 09:50 조회7,183회

본문

그릇된 종교, 이른바 사교(邪敎)의 가장 큰 특징이 그릇된 교리에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리가 진리에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 지를 가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보겠지만, 사교도 진리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현혹하기 때문에 그 중에 몇 가지는 그럴싸한 말이 있습니다. 그런 종교에서는 틀린 말은 슬쩍 묻어두고 몇 가지 그럴싸한 말만 드러내어 거기에 해석을 붙이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고려 때 장군으로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의 태평양함대를 물리쳤다.”고 말한다고 칩시다. 언뜻 들으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을 물리친 것으로 알아듣고 맞는 말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말은 전체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사교의 교리라는 것도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사고력이 있고 분별력이 있어도 사교의 교리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종교 인구의 태반이 이런데 기울고 있다는 것은 우리 국민의 정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해주는 현상입니다.


또 사교의 특징은 그저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줄뿐만 아니라 영생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교리체계, 신앙체계에서는 철학적 사유는 발 붙일 공간이 없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는 배척을 받습니다. 과학적 분석을 해 본다는 것은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저 시종일관 “믿습니다”로 일관합니다. 거기에 의심을 가지는 자는 그 종교를 믿을 자격이 없다고 몰아붙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거기에 질질 끌려가는 것을 보면 불쌍하다 못해 분노가 일기까지 합니다. 어리석어도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는지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리고 사교는 대체로 유일신을 섬깁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신의 정의도 모호하지만 어쨌든 자기들이 설정한 신, 자기들이 믿는 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 혹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원수처럼 여깁니다. 이교도에 대한 자비란 조금치도 없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교도로 하여금 자기들 신을 믿게 하든지 아니면 그들을 깡그리 이 세상에서 몰아내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던 중세 기독교도나 ‘코란이 아니면 칼을 받으라.’고 했던 이슬람교의 후예들이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같은 종교 집단 안에서도 신에 대한 정의가 서로 틀려 처참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서울에서 상영된 ‘여왕 마고’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을 화면에 옮긴 것인데 그 영화에서는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자기들끼리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로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하룻밤 사이에 온 도시를 피로 물들이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기들이 믿는 신만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다는 유일신사상이 빚어낸 비극인 것입니다.


이들의 유일신 신앙 때문에 애꿎은 불교도 피해를 봅니다. 불교는 결코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을 섬기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지 부처님이 우주를 지배하고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이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교까지도 도매금으로 싸잡아서 불교도를 미워하고 온갖 훼방을 다 놓습니다. 그 때문에 훼손된 불교유적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제 사교의 범주에 들어가는 이러한 그릇된 종교들과 비교하여 불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불교는 미신이나 맹신을 배격하는 지혜의 종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라고 하면 믿음[信], 혹은 신앙이 필수적입니다. 어떤 종교라도 믿음을 빼고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릇된 교리이든 이치에 합당한 교리이든 자기의 종교로 선택한 이상은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 종교의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불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불교에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승가의 이른바 삼보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여도 어떤 것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바른 믿음도 되고 그렇지 못한 믿음도 됩니다.


어떤 것을 잘못 믿는 것을 미신(迷信)이라고 하며, 무조건 믿는 것을 맹신(盲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미신과 맹신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닙니다. 미신과 맹신이 정도를 넘는 것을 우리는 광신(狂信)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믿음이 광신의 정도에까지 이르면 그 때는 정말 큰일 납니다. 광신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서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자신을 파멸로 가져갑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게 만듭니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사회를 위협하고 때로는 국가의 존립마저도 위태롭게 하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같은 것을 보면, 몇 사람의 광신자가 온 나라를 가난과 암흑 속으로 몰아넣더니 결국은 온 국민을 전쟁의 참화 속에 빠뜨렸습니다. 이러한 광신자들로 인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나라는 아직도 가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마미얀 석불도 그 때에 파괴된 것인데, 차라리 그 석불이라도 잘 보존했더라면 그들의 어려운 경제에 두고두고 보탬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러한 예는 미신과 맹신이 도를 넘어 광신에 이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신과 맹신은 인간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무명(無明)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가 징크스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무명으로 인한 일종의 미신입니다. 그러한 징크스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맹신이지요. 우리 주위에서도 이러한 예는 아마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이런 징크스에 집착해서 어떤 일을 결정하지는 않습니까?


미신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고방식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모든 결과에는 항상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디로 사교에서 말하는 기적 같은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 것을 믿는 것이 곧 미신입니다.
국어사전에는 기적을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 혹은 ‘신이 보여주는 뜻밖의 힘’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과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금의 이 과학시대야 말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달나라에까지도 갔다 오고 텔레비전 들여다보면 앉아서도 세상 구경 다 할 수 있으니 이게 기적이라면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교일수록 이 기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이기도 하고 죽을 사람을 기적 같이 고쳤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고치고 살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요즘 종합병원에서 사람 치료하고 살리는 숫자보다 많겠습니까? 이 세상에 기적은 없습니다. 혹 기적 같은 일이 있어도 그것은 인과관계를 정확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단지 기적처럼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기적을 믿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과학이 발달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 현대인들이 기적이란 것을 믿으며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나약해지면 이런 기적을 믿게 되나 봅니다. 미신이 꼭 작두 위에 올라서서 푸닥거리나 해야 미신인줄 알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자기에게 뭔가 힘을 주고 기적을 보여 줄 거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